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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할아버지와 최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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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8-05-19 02:07 조회 3,61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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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이씨 족보(1724년) ]

 

둔촌할아버지가 영남지방과 맺은 인연에 대해서는 '둔촌선생과 최사간'이란 이야기로 후손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제총화(慵齋叢話)』를 비롯하여 『둔촌선생유고(遁村先生遺稿)』, 『유사(遺事)』, 김시양의 『자해필담(紫海筆談』,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고문서인 '통문(通文)'등에 실려 있는데,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둔촌할아버지는 일찍이 송경 용수산(松京 龍首山) 아래에 사셨는데 할아버지께서 고려 공민왕 무신년(서기 1368년)에 요승 신돈의 비행울 대중앞에서 논박하였으므로 채판서(蔡判書)의 밀고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까하여 노환이신 부친[당(唐)할아버지]을 업고서 천리 먼길을 남(南)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낮에는 사람을 피하여 산 속에 숨고 밤을 이용하여 내려오시니 굶주림과 야수의 내침과 추적자의 두려움을 싸우시며 경북 영천에 사는 사간(司諫)을 지낸 할아버지의 친구 최원도(일명 : 최사간) 집에 당도하게 되셨다. 마침 최공 댁에는 생신 잔치가 있어서 빈객이 많이 모여 있었다.
행낭채에 들어서 기별을 드리니 최공이 나와서 냉대하면서 하는 말이 "자네 집이나 망하지 남의 집까지 망하게 하려고 하느냐" 하면서 괄시하고 쫓아버린 뒤에 둔촌할아버지가 머무른 행랑채 마저 불태워 버렸다. 이것을 본 손님들은 너무나 냉정한 일이라고 비소하고 돌아갔다.
저녁이 되어서 손님들이 다 흩어진 후에 최공은 혼자서 등불을 들고 동구 밖 솔 밭쪽으로 나왔다. 이와 같이 쫓겨난 생원공[당(唐)할아버지]께서는 나는 늙어서 이제 죽어도 한이 없으니 나를 두고 네 몸이라도 피신하여 화를 면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둔촌할아버지께서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동구 밖 솔밭가에 부자분이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최공이 우리를 그대로 괄시하지는 아니할 것이니 여기에 은신하여 기다려 보자하시고 솔밭속에 숨어 계시니 최공이 밤늦게 등불을 들고 나와서 여기에 "이우(李友)는 여기 있는가?, 없는가?" 하며 찾았다.
부자분이 최공 앞에 나서니 최공은 먼저 사과하는 말이 낮에는 여러 사람 눈을 피하기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니 내 참마음이 아니니 널리 양해하여 달라고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같이 와서 낮에는 다락에 숨고 밤이면 골방에서 쉬게 하였다. 그리고 최공이 안에 부탁하기를 요사이 내가 허기증이 자주나니 특히 큰 밥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오라고 하여 그 밥을 삼등분하여서 세분이 나누어서 먹게 되었다.
 
그 때 여종(제비)이 밥상을 들고 나가니 골방안에서 사람소리가 남으로 수상히 여기고 안에 들어가서 마님께 말하기를 서방님이 아마 여자를 골방에 숨겨두신 것 같다고 말소리 들은것을 밀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최공이 볼일이 있어서 안방에 들어가니 부인께서 점잔케 하시는 말이 하배(아랫)것들 보기에 치사스럽게 어찌 골방에 여자를 숨겨두느냐고 하니 최공은 아무 말 없이 부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로서 부인은 눈치를 채고서 행여 말을 하여 가문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고서 그 자리에서 스스로 혀를 잘라버리고, 여종(제비)도 말이 새어 나가서 주인댁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자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비의 무덤을 마을 어귀의 솔밭사이에 고이 장사지내 주어서 고인의 넋을 위로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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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당(唐) 할아버지 묘소 아래쪽에 있는 연아총(燕娥塚-제비무덤)
 
그리고 그 후로는 오늘날까지 시조산소(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2동)에 묘사를 지낼 때는 제비의 묘에도 박주 일배를 올리고 기리 고혼을 위로해주고 있으니, 지금 마을 어귀 솔밭속에 연비지묘(燕陴之墓)란 작은 표석이 서있는 초라한 작은 무덤을 볼 수가 있다.
 
생원공[당(唐)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최공가(家)에서 피신해 계신지 일년만인 다음해에 별세하시니 최공께서는 친상을 당한 것 같이 슬퍼하시어 초상 범절을 친상과 다름없이 정성껏 하시고 행여 말이 날까 염려한 나머지 자기 부인을 피신시키고 처(妻)의 상을 당한것 같이 가장하고서 조객을 마지 하였다.
이 내막을 잘 아는 하인이 포상을 받기 위해서 관가에 밀고하였다. 그래서 포졸이 몰려와서 관을 열어 보자고 윽박지르고 있는데 그 때의 둔촌할아버지께서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시다가 화가 최공께 미치게 되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뛰쳐나와서 나를 잡아가거라 관은 절대로 열 수 없다고 달려드니 포졸들은 둔촌할아버지를 결박하여 갈려고 하는 찰나에 관원이 급하게 달려오며 하는 말이 생원공의 상소하신것이 가납되어서 죄가 무사히 되었으니 결박한 것을 풀어 주라고 한것이다. 그래서 위기 일발에 면화하게 되었다.
 
그 전에 신돈은 나졸을 풀어서 둔촌할아버지 부자(父子)를 체포할려고 인근 고을을 샅샅이 뒤지게 되었으나 사람들의 말이 최사간이 이공을 쫓아내고 행랑채마저 불살랐다는 말에 최공의 마을엔 오지도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곤경을 겪고서 최공은 자기 산에 장사 지내게 하였는데 최공 모(母)부인 묘소 아래쪽으로 불과 백보 내 지점이다. 이 곳이 이른바 조선팔대(朝鮮八大) 명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만대 영화지라고 한다.
 
 
둔촌할아버지와 최사간의 이야기는 옛날 선조들의 우정과 의리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일화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 광주이씨로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한 명가의 태동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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