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희공(忠僖公 - 이인손)의 묘소 이야기 > 광이일화 · 석전문중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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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희공(忠僖公 - 이인손)의 묘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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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8-05-19 06:54 조회 3,68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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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희공의 원래 묘소는 현 세종대왕의 영정자리었는데 예종(睿宗)이 세종대왕의 능소를 광주에서 이 곳으로 이장하게 되어 충희공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로 이장한 것이다.  

 

현재의 영능자리는 전하는바에 의하면 문무봉군지지요 9대(九代) 將相之地(장사지지)라 하였는데 서북로는 금반형이 있어 三十대 將相之地(장상지지)로서 산천 정기를 뽑고 있는 여주 북선산 꾀꼬리봉에서 뚝 떨어진 용세가 구비쳐 가다가 다시 솟으면서 남으로 그 머리를 돌려 주봉인 꾀꼬리를 바라보며 솟아오르다가 뚝 그쳤다. 이 산줄기를 감싸준 소국은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오 대국은 회룡고조형으로 다시 조산을 돌아보는 형국이다.

 

그 자리 위에는 병풍을 두른 듯 완만하게 개장되고 좌청룡 우백호가 겹겹히 쌓여서 꽃 닢을 두른 듯이 혈판을 감싸주고 있어서 마치 꽃봉오리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백호날이 안산을 바라보니 마치 신하가 군왕에게 조례를 드리는 듯한 군 신봉조형으로 되어 있다.

 

이 명당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당부하기를 자손이 앞으로 헌천부귀 하더라도 묘각을 짓지 말 것이며, 앞으로 흐르는 내(川)에 다리도 놓지말라고 주의하였다. 이 산소를 모신 뒤에는 아들 오(五)형제분이 승진하셔서 장자 극배공은 영의정, 광릉부원군 차자 극감공은 형조판서 광능부원군이요, 三(삼)자 극증공은 병·이조판서를 거쳐 관중추부사 광천군이오, 四(사)자 극돈공은 좌찬성 광원군이오, 五(오)자 극균공은 좌의정 광남공이며 종반 三兄弟(삼형제)분도 극규공은 형조참의, 극기공은 공조참판_성리학 학자요, 극견공은 좌통례로서 광이 장안에 八克(팔극)조정이란 말이 퍼져있었으며, 五(오)봉군 五兄弟(오형제)가 살던 정동은 五궁 고을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성종대왕께서는 生子當廣李 滿庭追如許人[생자당광이 만정추여허인 - 아들을 낳으면 광주이가만 같은 아들을 낳아라, 조정 뜰 가득히 허공(허조 영상)과 같은 인재가 자꾸 나오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李克(이극)은 개 호걸이요, 韓忠(한충)은 진 용봉이라 했으니 당시 광이의 창성은 成俔(성현)의 慵齋叢話(용재총화)에서도 밝혔듯이 해동에서 제일 창성한 집안이었다.

 

이와 같이 명당의 발복으로 광이 문세가 왕성하였으나 그 발복은 다 받지 못하고 이 명당은 왕기가 서렸다는 명산으로서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세종대왕의 능소는 광주 곡천(현재 형능 아래쪽 성남시로 가는 길가)에 있었으나 文宗(문종) 一年뒤에 승하하시고 또 궁중 내에서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남으로 큰 화근이라 하여 睿宗(예종)은 지관의 말을 듣고서 능소를 이장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신들은 조를 짜서 명당자리를 구하기로 하였다.

그 때에 마침 한 일행이 여주산맥을 따라 내려오다가 골짜기로 들어서 산림속을 헤매든 중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서 비를 피하려고 살펴보니 산림속에 한 정자가 보이기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서 비석이 서 있는 묘를 발견하고서 가까이 가서보니 前朝(전조) 右相(우상) 이모(仁孫)의 묘인데 산세가 수려하고 정기가 어리어서 비단 將相之地(장상지지)가 아니라 왕기가 서리어는 대명당이었다. 돌아가서 왕을 拜謁(배알)하니 왕께서 '능소를 정할 좋은 명당자리를 구했느냐'고 하문하셨다.

 

지관이 아뢰기를 '참으로 좋은 명당자리가 있긴 하옵니다만 ..은' 하고 말끝을 흐리었다. '그런데 어떠하다는 말이오'하고 왕은 반문하였다. 그러자 지관은 '그것은 벌써 타인이 쓴 것으로 아뢰옵니다.' 라고 하였다. '누구의 묘소인가' 하고 물으시자 '前朝(전조) 右相(우상) 이모(仁孫)의 묘인가 하옵니다.' 고 아뢰니 왕은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더운데 수고들 하였다' 하시고 어사주를 내리시고 위로한 후에 돌려 보냈다.

 

그리고 충희공의 자제인 극배공에게 왕이 말씀하시기를 '공에게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 말하기가 어렵다'고 하시었다. '무슨 분부이신온지요'하고 아뢰이니 '위선사에는 군신이 일반인데 선대왕의 능침이 불길하다기에 지관에게 구산을 하였던 바 공의 선영자리가 명당자리라고 하나 차마말하기가 곤란하오' 라고 하시는 것이다.

 

공은 '물러가 집안에 상의하고 아뢰겠습니다.' 하고 물러 나왔다. 그리하여 종반 八克 兄弟(팔극 형제)들과 문중 어른들이 상의할 때 광원군 극돈공과 광남군 극균공은 극구 반대하였으나 백형(伯兄)인 극배공은 천도와 지도가 따로 있으니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하여 이장키로 하고 지관을 데리고 구산을 하여 광주 선산에 모시기로 하고 일진을 가리어 충희공의 묘소를 파헤치고 관을 덜어내니 그 밑에 기름종이가 발견되었다. 한 구절의 글이 쓰여 있었는데 이는 고려국 국사인 地聖(지성) 玉龍寺(옥룡사 - 또는 법왕사) 道詵(도선)의 秘記(비기)이었다.

 

『상공삼년 권조지지 단지대 왕 영평지지(相公三年 權操之地 短之大 王 永平之地) - 상공이 삼년임시로 장사지낸 뒤에 다리 짧은 임금님(세종)의 기리 장사할 곳』이라 쓰여 있었고, 또 비기 하나는 이 자리에 주인이 나타나면 연을 높이 올려서 연줄을 끊고서 연이 날아가서 떨어진 곳에 장사 지내라고 하였다. 이를 본 집안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기고 그대로 하였더니 연은 날아서 十里 밖에가서 떨어졌으므로 그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延注里(연주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곳이 경기도 능서면 신지리 충희공의 현 묘소 부근이다. 이 자리도 명당으로서 그 후 자손들이 十대까지만도 직계자손이 二百여명이나 등과하였다. 그때 이곳으로 세종대왕 능을 장사지내므로 전주 이씨 왕문이 二百年을 더하여서 五百十九年(519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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