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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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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4(현종 5)∼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례(元禮), 호는 예남(蘂南)·정졸재(貞拙齋). 도승지 시만(蓍晩)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6년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하여 정자·봉상시직장·평안도도사 등을 역임하고, 1700년에 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장령 등을 지내고 1704년에는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6년에 집의·사간·경연관 등을 거쳐 성천부사·순흥부사 등으로 나가 학정(學政)과 근검에 힘썼고, 1712년 다시 사간·남학교수(南學敎授) 등을 역임하고 1716년에 사직하였다.

    그뒤 1721년(경종 1) 다시 순천부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수찬·응교를 거쳐 의주부윤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간·경상도관찰사·호조참의·강릉부사에 이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판결사·공조참판 겸 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727년(영조 3) 예조참판·형조참판·대사헌 겸 비변사당상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다시 형조참판 겸 승문원좨주를 역임, 1743년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고, 한성부판윤·대사헌 겸 선공감제조·공조판서를 거쳐, 1747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계하여 서추(西樞)에 배속되었다.
    영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 《경전차의 經傳箚疑》·《송현제서증해 宋賢諸書證解》가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在澗集. 〈朴定子>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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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여구(汝久). 삼도수군통제사 도빈(道彬)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를 지내고 1698년(숙종 24) 함경도병마절도사, 1701년 총융사를 거쳐 포도대장·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부사직이 되었으며, 이해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소론의 탄핵을 받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소론은 목호룡(睦虎龍)으로 하여금 노론의 4대신을 역모로 무고하게 하여 노론일파를 실각하게 하였으며, 그도 백망(白望)·이희지(李喜之) 등과 함께 투옥되어 장살되었다.

    1724년(영조 3)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辛壬紀年提要, 黨議通略. 〈崔珍玉〉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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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6(인조 24)∼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이조판서 원정(元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좌부승지 언영(彦英)의 딸이다.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어 봉상시봉사·승정원주서를 거쳐 홍주목사로 나갔다. 경신대출척으로 파직되어 아버지 원정의 유배지 초산에 따라갔다.

    1683년(숙종 9) 다시 복관되어 우승지·전라도관찰사·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진정(賑政)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도민들이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永思碑)를 세웠다.

    외직에 있을 때에 견문한 사실과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시폐를 들어 시정책을 강구한 상소를 올렸으며,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서전차의 書傳箚疑〉·〈기뇌홍 記雷虹〉 등 많은 잡저를 남겼고, 저서로는 《정재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靜齋文集. 〈權虎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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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2(광해군 14)∼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아버지는 도장(道長)이며, 어머니는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큰 학자였던 할아버지 윤우(潤雨)에게도 수학하였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교리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70년 청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으며,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경신대출척으로 초산에 유배가던 도중에 불려와 장살당하였다.

    9년 뒤인 1689년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원된 뒤에도 여러 차례 정국의 변화에 따라 추탈(追奪)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귀암문집》이 있으며, 편저에는 《경산지 京山志》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樊巖集. 〈朴錫武〉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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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수(字綏). 부사 효훈(孝訓)의 아들로,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


    15세 때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이 심복을 시켜 자기를 거짓으로 논척하도록 꾸미고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그들의 논척이 부당하다는 소를 올리게 하여 자기의 지위를 굳히려 하는 일이 있자, 이를 알고 당시 남학장의(南學掌議)로서 이이첨의 간사한 꾀를 폭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이첨에 의하여 중형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그뒤 1633년(인조 11)사마시에 합격하고, 대신들에 의하여 지난날의 지조가 인정되어 왕에게 알려지게 되자 사옹원봉사에 특별히 임용되었다. 벼슬은 군수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車勇杰〉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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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장(李道長 1603년 : 선조36 ~ 1644년 : 인조22


    문신, 자는 태시, 호는 낙촌, 본관은 광주. 참의 윤우의 차자로서 영우에게 출계하였다.

    정한강 장여헌의 문인으로 1630년(인조 8)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정자에 등용되고 이어 주서, 검열, 사근도찰방, 지평 등을 거쳐 인조 16년에는 홍문록에 피선되고, 그 후 부수찬, 지평, 정언, 부교리, 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공은 학문이 뛰어나 인조 16년 12월, 지제교에 초선된후 교리, 헌납, 이조정랑, 사간, 부응교 등을 거쳐 합천군수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병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니 왕후비빈과 대신가족들은 이미 강화도로, 피난가고 적의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진격하여 옴에 당시 도제찰사 김유가 아무방비도 없이 국왕을 강화로 파천(播遷)할 것을 주청함에 공이 이를 반대하여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병력을 보내어 적병의 진격을 늦추게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파천을 하게 하되 혹시 도중에 어떤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 인군지인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강화의 안위를 확인한 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진언한 바있다.

    그 후 치욕적인 강화를 체결한 수 청의 진영에서 두 왕자를 인질로 하는 한편, 척화를 주장한 자의 명단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대신들은 서로 집필을 기피하여 공에게 권유하니 하는 수 없이 붓을 잡으니, 전후좌우에서 척화자의 명단을 빠짐없이 불렀으나 공은 삼학사의 이름만 쓰고는 붓을 놓고 강개한 태도로 말하기를 적의 요청은 사람의 수를 정한바 없는데 우리 스스로 많은 사람을 적어 더 많은 희생을 낼수는 없지 않느냐 하였다.

    이렇게 예리한 지혜로 결국은 많은 인명을 구한 일화가 있다. 1644년 향년 42세로 졸하니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집이 있다. 고령군 타산면 곽촌동에 묘소가 있으니 우의정 허목이 비문을 지었다.


    [문헌(文獻)]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칠곡부읍지(漆谷府邑誌), 거주지, 낙촌집(洛村集)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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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5(선조 8)∼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이(靜而).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광록(匡祿)이며, 어머니는 권적(權適)의 딸이다. 큰아버지 광국(匡國)에게 입양되었다.

    1603년(선조 36)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으로 등용되고, 1611년(광해군 3)에 훈련원습독관(訓鍊院習讀官)이 되었다.

    1616년에 해주판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듬해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곡산군수로 이배(移拜)되었다.

    1618년에 가산군수로 선치를 하였고, 그뒤 창주첨사(昌州僉使)를 거쳐 강계부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의 별장(別將)이 되어 안주(安州)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우찬성(右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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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3(선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빈(而賓), 호는 만회(晩晦). 영의정 준경(浚慶)의 증손이며, 시정(寺正) 사수(士修)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서·병조좌랑·수찬·지평·문학·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605년에 함경도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상의원정(尙衣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장령이 되고, 1610년에 한성부우윤이 되었다가 곧 대사간이 되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2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1618년에 한남군(漢南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우참찬·특진관(特進官)을 지내고 1627년(인조 5)에 다시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적을 피하여 달아났다.

    1641년에 경기도관찰사로 등용되고, 1644년에 예조참판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 심양에 다녀왔다.

    이듬해 개성부유수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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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무과에 급제하였다.

    초기의 경력은 알 수 없으며, 1612년(광해군 4)에 삭주부사를 거쳐 회양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삭주부사 때 해유(解由:관원들이 전직할 때 재직중의 회계·물품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받던 일)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1615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광해군 말기에는 당시 재상이었던 박승종(朴承宗)과 인가(姻家)였던 까닭에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때에 참훈(參勳)·상가(賞加)문제로 사헌부 및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특히 전라좌수사 때에는 약초를 진상하여 가자(加資)를 얻은 일로 사신(史臣)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인조반정 때 주모자들이 거사 날짜까지 잡았으나 박승종과의 관계가 밀접한 그가 궁성의 호위를 맡고 있기 때문에 그를 얻은 뒤에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모자의 한사람인 장유(張維)가 흥립의 사위인 자신의 동생 신(紳)을 이용하여 이흥립도 내응하여줄 것을 허락받았으며 이에 반정군이 기병하였다.

    이때에도 미리 고변이 있어서 박승종에게 문초를 받았으나 박승종에게 어찌 공을 배반할 것이냐는 말로 반문하면서 위기를 모면하여 반정은 성공하였다.

    인조즉위 후 박승종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대의에 따라 거사에 가담하였으며, 그가 가담한 뒤에야 모두 의견이 정하여졌으므로, 공이 제일 크다고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의 훈을 받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하여졌으며, 수원부사의 직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수원부사 겸 경기방어사가 되었으나 이괄의 반란군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옥에서 자결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朝野會通. 〈李泰鎭〉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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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해수, 호는 북악(北嶽).

    1588년(선조 21) 사자관(寫字官)으로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많은 필적을 남겼으며 임진왜란 때는 역관(譯官)으로 일본과의 화의 교섭에 종사했다.

    159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602년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에 이르렀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 김 상(金 相)으로부터 한 호(韓 濩)에 필적하는 명필이라고 격찬을 받았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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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9(선조 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출신.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후손으로, 희복(熙復)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고,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金龍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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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0(명종 1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 좌찬성 극돈(克墩)의 후손이며, 우선(友善)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3년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으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 거상(居喪)을 극진히 함으로써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승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1608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이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소북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鄭仁弘)과 짜고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해 2월에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일약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권세를 장악한 그는 정인홍과 함께 자기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 진(臨海君珒)과 유영경을 사사하게 하는 등 소북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 태경(晋陵君泰慶) 등을 죽이고, 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 그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하게 하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하게 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이듬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당하였다. 아들 원엽(元燁)·홍엽(弘燁)·대엽(大燁)삼형제도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朝野輯要. 〈趙啓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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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7(명종 12)∼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군수 호약(好約)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金馹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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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6(명종 11)∼1595(선조 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아버지는 판결사 시무(時茂)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의원군 억(義原君億)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 사마시에 합격, 158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82년에 수찬으로 있을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시강하여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어사가 되어 호남에 내려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였다.

    그뒤 형조참의·좌승지 등을 거쳐,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장령·집의·응교·직제학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의로 왕을 호종하였다. 왕의 행차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선조에게, 종묘와 사직의 위판(位版)이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고 아뢰니 선조가 크게 놀라면서 즉시 모셔오라 하였다.

    그는 급히 개성으로 달려가, 사람들이 모두 “이미 적장이 와 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평양으로 모셔갔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593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한때 관직을 떠났다.

    1595년에 한성부좌윤·황해도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하여졌고, 1596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계은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淸選考.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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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1(명종 6)∼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여진(汝震). 준의(遵義)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선조의 사부(師傅)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부제학으로서 선조를 호종하면서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 제독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사후인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녹훈되었다. 뒤에 한천군(漢川君)으로 봉해졌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廣州邑誌. 〈兪炳勇〉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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