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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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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6(세종 28)∼1522(중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숭보(崇甫). 찰방 관의(寬義)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사예·사간원사간·성균관사성을 거쳐, 1499년(연산군 5)사헌집의·사도시정(司䆃寺正)을 역임하였다.

    1500년 초무부사(招撫副使)로 해랑도(海浪島)의 유민을 수색한 공으로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되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 등에 이르렀다.

    1503년 형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재직중 갑자사화에 연루,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508년 형조판서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해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를 지내고, 151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515년 동지성균관사·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51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몸가짐이 염간(廉簡)하여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으로 일컬어졌으며, 성명(性命)의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천지·일월·성신의 도수에 환하였다. 시호는 문호(文胡)이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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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9(세종 21)∼1520(중종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방(子芳).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수철(守哲)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의 딸이다.

    1459년(세조 5)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활쏘기·말타기를 잘 하여 왕명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1470년(성종 1)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을 역임하고, 김해부사·판교(判校)를 거쳐, 1492년 장례원판결사, 이어 충청도·함경도절도사, 충청도·황해도·전라도관찰사, 부제학·우부승지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한성부좌윤·우윤, 이조·예조참판을 거쳐, 형조·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하여지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508년 좌참찬 재임시 재덕(才德)이 없고 늙음을 핑계로 치사(致仕)를 요청하였으나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뒤 우찬성·좌찬성을 역임하고, 1512년 일본의 화호(和好)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513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영의정 유순(柳洵), 판서 안침(安琛) 등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容齋集(李荇).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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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의지(義之), 호는 율정(栗亭).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하여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진사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당시 진사의 위차가 생원의 아래에 있어 나이 많은 진사도 젊은 생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예조에 고쳐줄 것을 상계(上啓)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483년(성종 14) 성종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을 널리 구할 때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을 받아 경연(經筵)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론하였다. 서거정(徐居正)·허종(許琮) 등의 석학은 물론, 성종도 그의 고매한 품위와 박식에 탄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이때 성종이 높이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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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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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부(主簿) 우생(遇生)의 아들. 조선조에 평안도 절도부사(平安道節度副使)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增職),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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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방형(邦衡).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무술에도 뛰어남으로써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이 되었다.

    1459년 성균관주부를 거치고, 이어 회령도사·지평, 도체찰사의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김구(金龜)·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교정손자주해 校正孫子註解》를 찬하였다.

    1467년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滿浦節制使)가 되었고, 건주위 정벌의 군공으로 3등 공신이 되어 노비 6구(口)를 하사받았다.

    1469년(예종 1)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472년(성종 3)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147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7년 영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7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48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평안도절도사·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대사헌을 거쳐 1486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의금부당상·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 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경변사(警邊使)로 나아가고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좌의정 성준(成俊)과 함께 《서북제번기 西北諸蕃記》와 《서북지도 西北地圖》를 편찬하였다.

    1502년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왕에게 상소하였으며, 1503년 좌의정이 되었다. 여러 차례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갑자사화 때 조카 세좌(世佐)와 함께 연루되어 인동(仁同)으로 귀양가서 사사되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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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자화(子和), 호(號)는 음애(陰厓), 참판(參判) 극기(克基)의 아들.

    1480년(성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건릉 참봉(建陵參奉)을 거쳐 봉사(奉事)·직장(直長)·주부(主簿)를 지내고 공조(工曹)·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승진되었다. 이어 첨정(僉正)과 안성(安城)·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역임하였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학파(新進學派)에 연좌(連座)되어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어 적소(謫所)에서 여생을 마쳤다.


    영광의 보촌서원(甫村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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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중고(仲固), 관찰사(觀察使) 예손(禮孫)의 둘째 아들.

    조선조에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거쳐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역임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종반(從班) 숙질(叔侄) 등이 참화(慘禍)를 당(當)하자 처가(妻家) 고장인 전북 옥구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며 여생을 보냈다.

    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增職)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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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9(성종 2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안(子安). 황해도관찰사 예손(禮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서(朴曙)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65년 사헌부장령으로서 좌부승지 이영은(李永垠)과 함께 《경국대전》 이전(吏典)을 수교하였다. 그해에 종부시소윤, 1466년 의정부검상을 지내고, 1469년(예종 1) 사섬시부정으로서 삼포에 파견되어 왜사신접대사(倭使臣接待事)를 안핵(按覈)하였다.

    1470년(성종 1) 문학진흥을 위하여 재행(才行)이 겸비한 인물을 치부(置簿) 하였다가 겸예문관관(兼藝文館官)에 제수하는 겸예문관제의 실시와 함께 이에 선발되고, 1471년 1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에 의하여 “경명행수자(經明行修者)이니 사표직(師表職)에 제수하여야 한다.”고 하여 천거되었으며, 그해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면서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3월에는 강원도도사 최팔준(崔八俊)의 어육증여(魚肉贈與)와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그해 11월 성균관대사성으로 복직, 예문관부제학을 거쳐 1474년 8월 승정원좌부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우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77년 8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면서 재차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78년 대사헌으로 입조, 1479년 5월 이조참판, 8월 한성부우윤, 그해 윤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지중추부사로서 하정부사(賀正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0년 5월 한성부좌윤, 곧이어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으며, 1481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재차 하정사 겸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2년 11월 공조참판에 개수되고, 성균관동지사를 계속하여 겸하였다.

    1485년 1월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면서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성균관생들로부터 “계속하여 학업을 지도하게 하여달라.”는 강청(强請)이 있었으나 “치민(治民)도 교회(敎誨)에 못지않다.”는 성종의 뜻에 따라 부임하였다가 그해 11월 동지중추부사에 체직하였다.

    근근봉공(勤謹奉公)하는 성품과 성리학에 정통한 재질로 성균관의 교육에 힘써,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사유자(師儒者)로 칭송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韓忠熙〉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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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5(세종 17)∼1503(연산군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주부(典農寺注簿)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468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대사헌·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147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7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494년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호조판서를 지내고, 그동안 평안·강원·전라·경상·영안(永安) 5도의 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고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지냈다.

    전례(典禮)에 밝고 사장(詞章)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성종 이후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와 항상 반목이 심하였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의 많은 학자를 제거하는 데 큰 구실을 한 원흉으로 일컬어진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 吊義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하여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성종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데리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먹은 일을 사초에 쓴 사실을 알고 가만히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을 충동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 등 사림파의 많은 학자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어세겸·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詮) 등과 함께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사화가 있은 뒤 잠시 파직을 당하였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라 하였으나, 뒤에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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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1(세종 13)∼1494(성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위(景祁).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종묘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뒤 이조좌랑에 이르도록 항상 서연(書筵)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에 승진되었고, 1463년 성균관직강 겸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부호군(定略將軍副護軍)에 임명되고, 얼마 뒤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하여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경비의 식례(式例)인 《식례횡간 式例橫看》을 찬정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았고, 같은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1477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479년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가 되고,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넓혀 위판제도(位版制度)를 일신하였다.

    또, 향관(享官)의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의 북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고쳐 새롭게 하는 등 학궁(學宮)에 공이 컸고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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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7(세종 9)∼1465(세조 1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여(德輿).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면 대의를 통하였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집현전에 발탁되었고, 1447년에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1448년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아 즉위하자 검상이 되었고, 즉위에 즈음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왕세자가 책봉되었을 때 보도(輔導)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1458년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460년 북정(北征)때에는 기무를 관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수찬하였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을 교정하여 간행하였고, 1461년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북정록 北征錄》을 찬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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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2(세종 4)∼1495(연산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峰).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고, 이어 감찰이 되었으며,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정언·지제교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지난번 명나라에 갔을 때 검찰직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어 병조 겸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는 데의 공이 인정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1457년(세조 3) 예조참의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어 광릉군(廣陵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병조참판과 예조참판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1459년 북변의 야인정벌 때 신숙주(申叔舟)의 종사로 출전하였고, 돌아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 이래 호조·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는 평안도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선무하여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어 평안도관찰사에 올랐다.

    예종 때에는 우참찬이 되고, 이어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었으며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481년부터 2년 동안의 대기근이 발생하였을 때에 진휼사(賑恤使)로서 활약하였으며,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년 우의정이 되었고, 1493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하였으며, 다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하였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고 행정의 재능을 겸하였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데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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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공서(公瑞).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이지직(李之直)의 손자이다.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조카이며, 의정부사인 이장손(李長孫)의 아들이다.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의 사촌이다.

    [활동사항]
    1472년(성종 3) 춘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85년(성종 16) 지평으로 있으면서 4품 이상의 당하관에게 역마(驛馬)를 이용하게 하는 것은 역로의 조폐(凋弊)를 가져오므로 불가함을 주장하였고, 그의 사촌인 이극균이 병조판서가 되자 혐의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황해도의 도사를 역임하였고, 다시 영안도도사에 제수되자 이를 회피하고, 1491년 보덕이 되었다. 연산군 재위 때에는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 병조참의를 거쳐 1496년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497년에는 군액과 번상의 폐단, 재가녀 소생의 허통 등을 주장하였다. 1498년에 무오사화가 발생하자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은 법률에 따라 논단해서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에 관직을 사퇴하고 해주의 수양산 아래에 은거하다 그곳에서 죽었다.

    [기타]
    창녕의 운곡서원에 제향(祭享)되어 있다. 묘소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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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조 참의(刑曹參議) 양중(養中)의 아들. 조선조에 사온서 주부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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