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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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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약빙(李若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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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6:54 조회 1,80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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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성종 20)∼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초(熹初), 호는 준암(樽巖). 현감 자(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光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1508년(중종 3) 왕이 성균관에 들러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를 하사받았고, 1513년 수석으로 생원에 합격한 뒤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 공조정랑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19년 이조정랑으로 재직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형인 약수(若水)가 동료 유생 150여명을 이끌고 조광조의 신원을 호소하다가 옥에 갇히매 조광조와 약수의 사면을 주청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뒤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로 있으면서 1539년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을 청하다가 잡혀 들어와 삭직당하였다. 그리하여 충주 북촌(北村)에 가서 살면서 스스로 호를 준암이라 하였다.

그뒤 1543년 경기도의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수원부사·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내다가, 1547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재직하던 중 소윤인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이 정언각(鄭彦殼)의 양재역(良才驛)의 벽서고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일파를 모두 숙청할 때 대윤 윤임의 인척이라 하여 처형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그뒤 1570년(선조 3)에 신원되어 복직되었고, 몰수당하였던 가산을 돌려받았다. 대흥(大興)의 우천사(牛川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金成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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