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소개 / 방계종회 / 석탄공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광주이씨 소개 / 방계종회 / 석탄공

광주이씨 소개 / 방계종회 / 석탄공

방계종회 :

십운과공 

(十韻科公) 

율정공 

(栗亭公) 

석탄공 

(石灘公) 

암탄공 

(巖灘公)  




석탄공(石灘公) 묘비문

 

고려조 때 통정대부 형조좌참의 이공의 휘는 양중(養中)이다.


이태조 혁명 당시 신하되기를 거절하고 광주 남한산하에 은퇴하여 부르는 명에 응하지 않고 귀향을 갈지라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평소 때의 우의로 특별히 가선대부 한성판윤직을 주어도 받지 않음으로 태종이 오히려 광주에 가서 옛 정을 베풀거늘 公이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리니 태종이 기꺼이 놀다가 환궁할 뿐이요.


마침내 그 굳은 의지는 돌이키지 못하고 다만 석탄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관작을 내려 장려하고 석탄에게는 궁중 선물과 안부를 자주하나 석탄은 다만 시를 올려 사례하니 무릇 석탄의 굳은 지조는 옛날 백이숙제 뜻으로 엄자룡의 자취를 따르니 백세하에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고 태종의 융숭한 은혜 또한 옛날 광무황제에 지지 않으니 그 세수에 관계됨이 심히 중한지라 아니 태사씨가 사책에 자세히 적어 자능과 더불어 무궁하게 전하겠는가.


公의 손자 찬성(贊成) 한산군(漢山君)이 자손이 오래되면 선조의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막내 아들 부사 성언과 손자 현감 망을 시켜 그 친구 의성 김안국(金安國)에게 부탁하여 공의 사적을 대강 적어 돌에 새겨 뒷사람에게 끼치게하니 내가 이르되 공의 대절이 이 같으니 다른 것은 대개 추상할 수 있다.


 가범(家範)을 지켜 관작이 혁혁하고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사백여명이 되니 이 어찌 하늘이 공의 덕을 보답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해 명하여 가로되,


公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과 같고 공의 높은 절의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주나라같이 융숭하고 한나라같이 창성함에 많은 사람이 붇다트는데 저 멀리 나는 기러기는 마침내 어찌 할 수 없구나. 성군의 도량이 아니였다.


공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뇌(嚴子瀨)와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뜨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글을 새기노라.


정덕 십삼년 겨울에 대광보국숭록대부한산군 손(蓀) 입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지음
 


석탄공 사적부설



석탄공은 고려조 말기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이색과 정몽주, 길재, 서견 및 태종과 형제의 의를 맺고 고려 공민왕을 섬기다가 우왕 때에 요동 땅을 치려하거늘 석탄(石灘)이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 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이니 요동을 침이 불가하다고 극히 반대하되 왕이 듣지 않으니 때마침 조민수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석탄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냈었다.


이태조 혁명 초에 석탄은 이미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고죽부)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으니 그 글 뜻이 극히 강개분울하여 보는 사람으로서는 슬픔을 참기 어렵더라.


석탄은 항시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니 어찌하리요, 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다가 문득 삼각산을 바라보며 탄식하되 간신 조민수여, 나의 한이로다.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평상을 치니 손바닥이 다 터졌더라.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석탄의 집으로 오니 서견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서 이런 변을 안 볼 것을 하고 吉再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회탄하였다. 길재는 이미 산중으로 갔으니 과연 산각자로다.


즉시 이색은 오대산으로 가고 서견은 금천장으로 도망하다. 그 무렵에 태조가 석탄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며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李某는 고려조 때 수절 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하니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니 태조가 그 말을 듣고 끝내 석탄을 부르지 않다가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석탄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석탄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 버렸다.


태종은 석탄을 불러도 병을 핑계삼아 안 올 것을 알고 친히 남한산 아래로 와서 석탄을 만나보고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며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은가? 하니 석탄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요, 하고 因하여 길재(吉再)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祭祀)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석탄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니 대신들이 석탄을 탄핵하되 석탄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 가장 크다 하니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 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석탄을 헐뜯지 못하더라.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석탄에게 보내니 그 글 뜻은 술 석 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 시키지 못하리로다 했었다.


즉시 석탄의 큰 아들 우생에게 사온주부를 특배하였다.


석탄의 동생 이름은 양몽(養蒙)이요, 벼슬은 판서였는데 명철한 분이다.


먼저 고려의 국운이 다 됨을 알고 남한산장으로 도피하여 농부가 되었다가 이조 혁명 후에 왕촉전(王蜀傳)을 지어 석탄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형은 정몽주와 같이 고려조를 섬기다가 몽주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은 아직 생명을 보존하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 가십니까, 하니 석탄공 종중이 이날부터 만 권 서책을 다 한강에 던지고 의관을 벗어 불사르고 영영 산에서 나오지 않고 남녀 혼인을 다 전조 대신들과 하고, 이조 대신들과는 절대 상대하지 않으니 지금 광주 사람들은 석탄 형제의 굳은 절의를 옛날 백이와 숙제에 비하고 경기도 광주 구암에 서원을 짓고 둔촌선생과 석탄선생을 봉형하였다.


 

太宗의 友情
 
李養中은 太宗芳遠과는 어릴 때부터 한 마을에서 자란 竹馬之友이며 高麗末의 遺臣이다.


그는 芳遠이 文科에 及第하여 新進勢力을 形成할 때까지도 서로 多情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나 芳遠이 李成桂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분개하여 落鄕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사람이다.


太祖의 創業을 튼튼히 하기 위해 數많은 高麗遺臣을 죽인 芳遠이었으나 李養中만은 차마 해칠 수가 없었을 程度로 友情이 두텁던 터이어서 王位에 오른 후 漢城判尹 等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李養中은 每番 받지 않았다.


在位 末年에 다시 傳敎를 내려 李養中을 불렀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 왔다는 都承旨의 말에 「대감이 집에 안 계시면 며칠을 기다렸다 가라도 꼭 答旨를 받아오도록 하라」는 太宗의 말에 다시 李養中이 사는 마을로 내려간 軍卒은 역시 출타중인 李養中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酒幕에서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 그만 젊은 酒母와 情이 들고 말았다.


그런 것을 알 턱없는 太宗은 다시 都承旨를 불러「누가 傳敎를 가지고 갔기에 李養中大監에게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지금 당장 令을 내려 觀察使 휘하에 있는 軍士를 대동하고都承旨 그대가 直接 내려가서 대감을 모셔 오도록 하라」하고 호령하므로 都承旨가 가마를 준비하여 찾아 갔으나 李養中은 만나지 못하고 軍卒만 잡아서 漢陽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旅行에서 돌아온 李養中은 酒母에게 그 동안의 사연을 들었으며 그녀의 애절한 所望을 뿌리 칠 수 없어 잡혀간 軍卒을 求해 주기로 約束, 그토록 피하던 太宗을 만나러 갔다.


李養中의 입궐소식을 傳해 들은 太宗은 반가움에 못 이겨 버선발로 뛰어 나와 맞아 드렸다. 그러나 李養中은 自己에게 傳敎를 가져 왔다가 酒母와 情이 들었던 軍卒을 석방해 줄 것만 부탁했을 뿐 除授하는 벼슬은 끝내 받지를 않았다. 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다가는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추어 버렸는데 깜짝 놀란 太宗이 사람을 시켜 百方으로 찾아보았으나 끝내 종적을 알 길이 없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太宗은 王位를 世子에게 물려주고 食飮을 전패하며 자리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太宗이 묻힌 獻陵에 와서 정성껏 祭를 올리는 老人이 있었는데 그가 곧 李養中이였다고 한다. (城南市誌에서 轉載하다)


註 : 高麗末 恭愍王때에 文科에 及第하여 刑曹右參議에 올랐으며 太宗이 漢城判尹에 任命했으나 끝내 拒絶한 剛直한 忠節臣이다. 本이 廣州로 石灘公派 派祖이다. 
 


== 대종회 참조==



광주이씨 석전종중

  • 010-2068-2831
  •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암
  • 제작/관리이광호
  • 로그인하셔야합니다.질문과답변, 자유게시판등
  • 질문과답변
Copyright © 2019 광주이씨 석전종중.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