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소개 / 방계종회 / 암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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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계종회 :

십운과공 

(十韻科公) 

율정공 

(栗亭公) 

석탄공 

(石灘公) 

암탄공 

(巖灘公)  




암탄공 휘 양몽 묘비문 (巖灘公 諱 養蒙 墓碑文)



하늘의 원리는 크고 땅의 영기는 밝고 발은데 公께서 이 두 기운을 타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시니 광주이씨의 후예이시다.


諱 養蒙이시며 호는 巖灘이시니 시조 신라 내사령 휘 자성(自成)의 후손이시며 석탄 휘 양중(養中)의 아우이시다. 천성이 강직하시고 인품이 단아하시며 효심이 지극하시고 충절이 또한 비할 데 없었다.


고려 공민왕조에서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행(大匡輔國崇祿大夫行) 판도사판서(判圖司判書)시고 호부를 수임하시어 재화를 잘 다스리시고 나라가 부하고 병력이 강하게 될 계책에 힘쓰셨다. 그러나 시운이 불리하여 나라의 운이 쇠퇴하니 공민왕이 노국 대장공주의 세상을 뜨게 된 것을 비통해 한 연유로 정사에 관심이 없어 세상이 어지러워 짐으로 국내의 근심과 국외의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다.


公은 국운을 통탄하고 항상 임금님을 좌석에 뫼시어 기울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험에서 구제하기에 노력하였으나 대세를 회복하기 어려워져서 끝내 효력이 없었는데 결국은 환관 최홍지(崔洪之)들에 의해 역적의 변을 당하게 되니 公께서 심히 비통하시어 피눈물을 흘리시고 애달파 하셨다.


후에 왕우(王禑)와 왕창(王昌)이 어둡고 나약하여 재기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이씨의 당세가 왕성하여 마침내 공양왕을 폐하고 세상이 바뀌어 이씨가 등극하니 公이 형과 더불어 광주 남한산성 아래 동부면 덕풍리로 퇴거하셨다.


태종께서 광주에 오셔서 임금이 되시기 전의 친구의 의리로 공의 형제를 불러 서로 옛 정으로 대하였으나 공께서는 절하고 대하기를 싫어하고 마침애 실촌면 원적산 아래 만선동으로 피신하여 숨어서 수양하고 나가지 않으시며 자손들에게 유언해 가르치기를 과거 보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시고 군주의 위엄을 나타내고 아침 저녁으로 향배를 하여 신하의 지켜야 할 도리를 다 하시었다.


태종께서 이 일을 듣고 그 충절을 탄식하고 특히 하교하시기를 이양몽의 자손들에게는 영세토록 천역(賤役)을 시키지 말라.


오직 공의 충절만이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구나 하셨다.


배(配)에는 정경부인 나주박씨이신데 사남이녀를 낳으셨으나 귀훈을 받들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기를 현손 휘 명인(諱 明仁)까지 이르렀다.


일찍이 조회하는 자리에서 절의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상께서 李아무의 후손들의 거처를 물으시니 이웃에 살던 재상 한 분이 그 소재를 대답하니 그 자리에서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제수하시며 벼슬자리에 나오라 하시어 그 후부터 자손들이 과거보기 시작하여 5대손 휘 몽설(夢說)께서 무과에 급제하시어 병자호란 때 임금님을 뫼시고 남한산성까지 호위했다. 벼슬이 훈련원 검정에 이르고 판서를 추증받았다.


그 외에 후예들은 청절을 굳게 지키고 영욕(榮辱)을 돌아보지 않으며 선영 아래를 떠나지 않고 광주 용인 등지에 이웃해서 살아온 지 오늘날 500 여년 세상이 바뀌고 천명에 변화가 수차 있었으나 근년에 이르러 公의 영적 음덕이 다시 내려 한 집안 여러 일가들 중 이름난 분들이 날로 늘어가서 영명하시 은덕에 감동되어 뜻을 모으고 정성을 다하여 비석을 세우고 석물을 갖추어 그 덕을 세상에 밝히며 명하니 贊曰,




천운(天運)이 수(數)가 있고 지기(地氣)가 서로 통해

수양산(首陽山) 고사리를 원적산(元積山)서 캐였도다.


백이숙제(伯夷叔齊) 맑은 절개 암탄공(巖灘公)의 어지신 뜻

광릉땅 동쪽 준령(峻嶺) 공민봉(恭愍峰)이 주봉(主峰)이라.


충심은 향일(向日)하고 절개는 의송(依松)하니

두 임금 불배(不拜)함은 만세에 엄훈(嚴訓)이라.


반천년 오래 세월 영명을 빛내노니

수만년 지나도록 무궁하게 전하소서


단기 4309년(1976) 1월
 



洞名 由來



高德洞(고덕리, 고더기)


石灘 岩灘兄弟분의 높은 뜻을 기리는 뜻으로 새긴 이름이다.


元來는 廣州郡九川面의 一部로서 高麗末에 刑曹參議 石灘公 養中이 李太祖의 革命을 反對하여 이곳에 와서 숨어 사는데 太宗이 옛親舊의 情을 생각하여 漢城府尹을 시켜도 받지 않고 太宗이 廣州에 거동하여 石灘公을 찾으매 石灘公이 平民의 服色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뵈옵고 병술을 기우려 서로 즐겼으며 太宗이 그 높은 德을 생각하여 아들 遇生에게 벼슬을 시켜 주었으며 동생인 岩灘 養蒙公께서도 高麗朝에 벼슬이 大匡判圖判書에 이르렀는데 李成桂가 高麗를 없애고 李氏朝鮮을 세우니 兄님인 石灘公과 같이 首陽山에 들어 갔다가 廣州수리꼴로 물러나와 살았다.


太宗大王이 廣州로 가서 옛날의 親舊를 불러 드리고 싶어 岩灘公을 찾아가니 太宗을 만나 주지 않으시고 元積山으로 피하였다. 뿐만 아니라 子孫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희들은 科擧에 參與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科擧를 보게 되면 나의 志操를 짓밟는 行爲가 되는 것이니 이를 銘心하고 科擧에 應試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준절이 타일렀다. 太宗께서는 그 굳은 절개에 탄복 하면서 特命을 내리기를 李養蒙의 子孫에게는 萬世를 두고 賤한 일을 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그 후 世祖大王께서 여러 臣下를 모아놓고 書筵(서연)을 베풀고 節義問題를 내걸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때 世祖가 묻기를 李養蒙에게 子孫이 있느냐? 하시니 그 중에 한 臣下가 말하기를 李養蒙의 玄孫되는 明仁이 臣의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世祖께서는 이 말을 듣고 즉석에서 靖陵參奉의 職을 갖게 하였다. 이 消息이 明仁公에게 알려지니 祖上의 遺命을 어기고 내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祖上의 遺命을 지키기 위해서는 下命에 應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일가 권속을 거느리고 斗驛이란 곳으로 피해가서 살았다.


그리하여 이 두 兄弟분의 높은 德을 기리는 뜻으로 高德里라 하였는데 음이 轉化하여 「고더기」라 하다가 一九一四年 三月一日 京畿道 區城 劃定에 따라 가재울 비석말 방축말과 동자골의 一部를 倂合하여 고덕리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으며 一九六三年 一月一日 서울特別市에 編入되어 高德洞이 되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太宗은 王位를 世子에게 물려주고 食飮을 전패하며 자리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太宗이 묻힌 獻陵에 와서 정성껏 祭를 올리는 老人이 있었는데 그가 곧 李養中이였다고 한다. (城南市誌에서 轉載하다)

註 : 高麗末 恭愍王때에 文科에 及第하여 刑曹右參議에 올랐으며 太宗이 漢城判尹에 任命했으나 끝내 拒絶한 剛直한 忠節臣이다. 本貫이 廣州로 石灘公派 派祖이다.
 



洞名 由來

 
후미께(고지봉)


漢江가에 있는 山
① 후미진 곳에 있음으로 「후미께」라 함.
② 高麗末 石灘公(養中)이 세상을 避하여 이 산에 은거 하였음으로 高志峯이라 함.



王宿灘(왕숙탄)


太宗이 南漢山下에 계신 石灘公을 찾아 하룻밤을 宿泊하고 갔다 하여 그 部落을 王宿灘이라 傳한다. 



 

== 대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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