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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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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이씨의 역사적인물들입니다.

    광주이씨의 역사적인물들이 어떤분들인지 확인하시는 좋은 곳입니다..

    자주 봐 주세요..

    작성자[홈:귀암]_광호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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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35년 (중종30). 자는 사임(士任)으로 품계가 승사랑(承仕郞)에 이르렀다.

    광주이씨 칠곡파의 입향조이다. 부친 극견(克堅)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임하고 있을때 인근에 사는 영천최씨 최하(崔河)의 무남독녀와 결혼하면서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들로는 덕부(德符), 인부(仁符)를 두었다. 묘소는 칠곡군 지천면(枝川面) 주봉산(主峯山)에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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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9년(인조 7) ~ 1688년(숙종15).

    자는 사흥(士興). 호는 박곡(朴谷). 이도장(李道長)의 아들이다.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51년 생원시에 장원, 166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형조·병조정랑을 거쳐 의주부윤, 호조·병조참의, 좌우승지, 예조·호조참판, 한성우윤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는등 승지 9차례와 대사헌 5차례를 역임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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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5년 (선조 28) ~ 1659 (현종즉위).

    자는 태유(泰有), 호는 한죽정(寒竹亭)이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에게 나아가 배웠다. 관직은 처음에 의금부도사(義禁莩事)를 역임하였고, 병자호란때에는 국왕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시자 의병을 일으켜서 김식(金湜)등과 함께 조령(鳥嶺)을 방어하였다고 한다.

    이후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는 고향에 머물렀다고 한다.



    ■ 한죽정일기(寒竹亭日記) ■

    이윤우의 아들인 이도창이 남긴 일기로 매년 한 책씩 써 나갔는데, 현재 9책이 남아있다. 작성시기는 1639년부터 1659년까지인데, 중간에 유실된 부분이 있으며, 현재는 9년분이 남아있다.
    현전하는것은 1639년, 1642년, 1643년, 1645년, 1650년, 1653년, 1655년, 1656년, 1659년때의 것이다.

    이 일기는 표지에 '임오일과(壬午日課)', '계사일과(癸巳日課)' 처럼 쓴 시기만 기록하고 있다. 본문 내용은 통상적인 양반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특징적인 사항은 간혹 도서의 겉 장 안쪽에 '기신(忌辰)' 이라고 하여 이 집안의 제사 지내는 규정을 기록하여 두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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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2년(중종 37) ~ 1594년(선조 27). 자는 응초(應初). 훈련원 첨정(僉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이로 인해 통정대부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뒤에 증손자 이원정이 판서에 오르게 되어 재차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 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당시에 받은 공신녹권과 뒤에 호조참의에 추증되면서 받은 교지가 남아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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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선조 2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문언(文彦). 대제학 이첨(爾瞻)의 아들이고, 대사성 익엽(益燁)의 형이며, 이조참의 대엽(大燁)의 아우이다.

    문음으로 세자익위사세마가 되어 재직중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가 되었고, 이어서 정자·정언을 역임하였으며, 그해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15년 부교리가 된 뒤 헌납·성균관사서·지평·부수찬 등을 역임하고, 1617년 장악원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필선 겸 보덕·전한·동부승지에 이어 승지에 올랐다.

    대북파 집권하의 광해군 때 그의 아버지가 대북파의 영수로서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왕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기화로 등과한 뒤 5년 만에 빠르게 승진을 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아버지, 두 형제와 함께 주살(誅殺)당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文守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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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9(선조 22)∼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천미(天微). 영의정 준경(浚慶)의 증손이며, 예빈시정 사수(士修)의 아들이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고 1626년 승문원정자를 거쳐 저작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까지 호가하였고, 곧 박사가 되었다가 환도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여주로 돌아갔다.

    1628년 다시 박사를 제수받은 뒤 전적을 거쳐 감찰이 되었고, 이어 예조·병조·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32년 경성판윤(鏡城判尹)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호조·형조좌랑을 역임하고 다시 보성군수로 나가 곧 병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경상도사에 제수되었다.

    1635년 대동찰방(大同察訪)·형조정랑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이듬해 통례원상례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병으로 체직되어 여주에 우거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음을 듣고 호가를 위하여 곧 달려갔으나 중도에 청병(淸兵)을 만나 좌절되고 지평에서 의병을 모은 전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함께 춘천·양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이후 장령·예조정랑·군기시정·봉상시정 등과 네번에 걸친 사간의 임명, 두번에 걸친 홍문관응교의 제수, 승문원판교·사복시정·집의 등의 임명에 모두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여주에서 머물다가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만 일시 출사하였다가 곧 향리로 돌아갔다고 하고, 광해군 때의 폐모사건 이후 출사하지 않았던 영남의 김령(金#영03), 호남의 신천익(愼天翊)과 더불어 처음부터 사환(仕宦)에 뜻이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李文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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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덕형(德馨)의 4대손이며, 집의 윤문(允文)의 아들이다.

    경종 때 음관(蔭官)으로서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역임한 바 있으나,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로는 관력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던듯하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때에는 도성내 주도층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하(李河)·이유익(李有翼) 등과 더불어 장사를 모집하여 대궐을 침범할 계획을 하기도 하였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세 차례에 걸친 국문을 받고 사형에 처하여졌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承政院日記, 戊申逆獄推案. 〈具琓會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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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6(세조 12)∼1499(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수덕(樹德). 세우(世佑)의 아들이며, 약해(若海)의 아버지이다.

    1494년(성종 25)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이 점점 광포하여지자 경연에서 만날 때마다 풍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눈물을 흘리고는 하였다. 함창현감에 배수되어서는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시(詩)·예(禮)로 다스려 풍속이 변하였다.

    《성종실록》 편찬에 춘추관기사관으로 참여하였고,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고 종음(縱飮)하여 죽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崔珍玉〉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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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선조 27)∼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대원(大遠). 광해군 때의 권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첨(爾瞻)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저작·부수찬·부교리·직제학을 거친 뒤 승지·대사성을 역임하였다.

    그의 형 원엽(元燁)·홍엽(弘葉)·대엽(大葉)과 함께 4형제 모두 문과에 등제하였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아버지 이첨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崔珍玉〉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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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4(정조 1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문약(文若). 종억(宗億)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음직으로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848년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57년(철종 8) 강화부유수·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동지성균관사·경연관(經筵官)을 지냈다.

    1862년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새로운 인물이 중요한 관직에 기용될 때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4년(고종 1)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1865년 이조판서로 중용되었고, 이듬해에는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70세가 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李相燦〉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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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0(효종 1)∼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응(善應), 호는 농은(農隱). 충정공 준경(忠正公浚慶)의 5대손이며 후징(厚徵)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禹仁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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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6(인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옹(士雍). 덕형(德馨)의 증손이며, 상진(象震)의 아들이다.

    1692년(숙종 18)에 부평부사로서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등과하였다.

    학문이 깊고 문장에 능하여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그밖에도 사간원 헌납·사간, 사헌부집의 등으로 간관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임실현감·부평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정사에 힘썼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元裕漢〉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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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7(순조 27)∼? 조선 말기의 무관.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중곡(中谷). 기석(基碩)의 아들이다.

    무과출신으로 1864년(고종 1)부터 1868년까지 선전관(宣傳官)·금위영천총(禁衛營千摠),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 좌·우승지, 그리고 태안부사를 역임하였다.

    1872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부사를 거쳐 1881년초 조선조사일본시찰단(朝鮮朝士日本視察團)에 군계선함사차정참획관(軍械船艦事差定參劃官)으로 참가, 총포·선박 등 주로 육군조련(陸軍操鍊)관계 분야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때 이동인(李東仁)은 참모관이었다.

    같은해 9월 도총부부총관에 발탁되었다가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고, 같은해 11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에 임명, 군무사분국절목(軍務司分局節目)의 결정에 따라 교련국구관(敎鍊局句管)이 되어 근대식 군부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1882년 4월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같은해 10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1885년 11월과 이듬해 4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승급된 뒤 6월 한성부판윤에 승진하였다.

    1887년 영국에 의한 거문도 강점사건이 일어나자 거문도경략사(巨文島經略使)로 임명되어 거문도사건의 처리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1889년 대호군에 승급, 이듬해 재차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나자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가 되어 친군(親軍)의 장위(壯衛)·통위(統衛)양영병을 인솔하여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협력하여 전주를 수복하였다.

    그해 갑오경장으로 개화파 중심의 정부가 수립되자 좌포도대장에 기용되었다.

    저서로 《일본육군조전 日本陸軍操典》 4책이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東學亂記錄, 日東錄, 東京日記, 從政年表, 從官日記, 萬姓大同譜, 紳士遊覽團考(鄭玉子, 歷史學報 27, 1965)
    1881年朝鮮朝士日本視察團에 관한 一硏究(許東賢, 韓國史硏究 52, 1986). 〈李完宰〉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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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7(성종 18)∼1523(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응서(應瑞). 장단부사 이반(李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송희열(宋希烈)의 딸이다.

    진사로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형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사헌부장령·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현량과(賢良科)폐지 의견이 제시되자 그 불가함을 거론하면서 “이 과거가 비록 불공평하다고는 하지만 만약 파하면 그 사람들은 종신토록 금고를 당하는 것이니 어찌 쓸만한 사람까지 다 버릴 것인가!”라고 하여 적극 반대하고 사직을 요청하자, 이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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