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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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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광양군(廣陽君) 세좌(世佐)의 5대손이다.

    숙종 때 부사를 지냈으며, 무신란(戊申亂:李麟佐의 亂)이 일어났을 때 운량도감(運糧都監)이 되어 그의 두 아들 자간(自侃)·여간(汝侃)과 도모하여 양곡을 모아 군소(軍所)에 보냈고, 의사(義士)들과 더불어 운봉(雲峯)의 팔량치(八良峙)를 지킴으로써 난군이 넘지 못하게 하였다.

    운봉의 천총(千摠) 정준교(鄭俊僑)와 함께 함양에 들어가, 난을 일으킨 최존서(崔存緖)·허격(許格)을 생포하여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湖南三綱錄. 〈禹仁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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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1(인조 19)∼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응(定應), 호는 동애(東厓). 후징(厚徵)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통덕랑으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녹선되었다.

    1683년 부수찬으로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8년 수찬이 되고, 1689년 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어, 지난해 희빈 장씨(嬉嬪張氏)소생인 왕자의 명호(名號)를 정하는 일과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서인의 거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이 시기상조라고 상소한 것에 논박하여 이들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남인이 세력을 잡은 이른바 기사환국을 불러일으켰다.

    1690년 대사간이 되고, 1693년 도승지에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號譜. 〈金龍國〉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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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1(현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효백(孝伯). 만경(晩卿)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에 생원이 되고, 170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22년(경종 2) 부수찬을 역임하고 수찬에 올랐다.

    이듬해 진위 겸 진향사(進慰兼進香使)여성군 집(礪城君楫)과 함께 그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는 필선이 되었다. 이어서 헌납·집의·수찬·보덕·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 때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간언으로써 이를 막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그뒤 다시 복직되어 형조참의·승지·동지의금부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文守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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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7(성종 8)∼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간중(幹仲).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며, 어머니는 강원도관찰사 조근(趙瑾)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24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장원이 되었고, 이어 그해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그뒤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수찬을 역임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아버지가 성종 때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간 형방승지였던 것이 화근이 되어 아버지를 비롯, 형들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당시 형제들이 모두 명망이 높았는데 이때 일시에 처형을 당하니 세상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禹仁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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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광양군(光陽君) 세좌(世佐)의 아들이다.

    1493(성종 24) 정조사(正朝使)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품계가 한 등급 오르고 이듬해 참봉·봉사를 역임하였다.

    1498(연산군 4) 오위부사직(五衛副司直)으로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이 되었으나 그 자격이 말썽이 되어 물러났으며, 1504년 아버지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장배(杖配)되고, 같은해 난신연좌례(亂臣緣坐例)로 처참효수(處斬梟首)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燃藜室記述, 己卯錄補遺.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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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군미(君美). 정국3등공신인 찬성 손(蓀)의 아들이다.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靖國功臣)4등에 책봉되었고, 1509년(중종 4)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10년에는 지평에 임명되었다.

    1511년에 장령을 지낸 뒤 1512년에는 무재(武才)가 있다고 해서 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부임을 회피하였으므로 수원부사와 서로 바꾸었다.

    1517년에는 수원부사로 있으면서 이행(李荇)을 변론한 상서가 광패(狂悖)한 표현이 많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에 의하여 이루어진 대규모의 정국공신 삭훈시에 그도 삭훈되었다가 기묘사화 후 복적되었다.

    1522년에는 당시에 통훈대부 검상이었으나, 무재를 지닌 문신으로 여겨져 당상관으로 가자된 뒤 만포첨사에 임명되었다.
    1525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528년에는 다시 무재가 있다는 이유로 가자되면서 함경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그뒤 황주목사를 지내고 1531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32년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33년에는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1534년에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任先彬〉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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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8(현종 9)∼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계수(季受). 덕형(德馨)의 5대손이며, 권유(權愈)의 문인이다.

    1690년(숙종 16)진사시에 합격하고, 1707년 경녕전참봉(敬寧殿參奉)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노론측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한때 파직되었다.

    1721년(경종 1)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에 등용되었고 외직으로 나아가 창평·익산·김포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뒤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전주판관이 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품계가 올랐으나 노론측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반대에 부딪혀 관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順菴集. 〈金海榮〉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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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3(현종 4)∼1723(경종 3).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광주(廣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지하(祉遐)의 아들이다.

    1697년(숙종 23)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의 나이 35세 때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이 되었다.

    그뒤 전적, 예조와 병조의 좌랑과 정랑, 서산현감, 전라도와 강원도의 도사, 울진현감·정언·헌납·지평·장령·장악원정을 역임하고, 1716년(숙종 42)에 강계부사가 되었다.

    그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와 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성주목사로 발령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재직중 죽었다.

    그는 지극한 효자로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지극한 정성으로 시묘를 하면서 애통해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또다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고, 스스로의 몸과 어머니의 병을 대신하여줄 것을 신에게 빌었다. 여러 번 손가락을 자른 것이 병이 되어 죽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陶谷集.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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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6(영조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상욱(尙煜)의 손자로, 기숭(基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주(金霔)의 딸이다. 충주에서 살았다.

    1813년(순조 13)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19년 승문원박사에 제수되었다.

    그뒤 1822년 홍문관의 교리·수찬을 임명하기 위하여 만든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1826년 권점(圈點)4점으로 도당록(都堂錄)에 등록되었다.

    1829년 세자시강원문학을 제수받고 예식절차를 맡는 임시벼슬인 예모관(禮貌官)에 임명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자(陞資)되었다.

    1831년 홍주목사로 재임중 이양선(異樣船)한척이 홍주의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하자,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영국이 배로 무역의 길을 트기 위해 온 것을 알아내어 정부에 보고하는 민첩함을 보였다.

    그뒤 1835년(헌종 1)대사간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李載琥〉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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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지윤(志尹), 호는 사병(四屛). 공조참의 홍(洪)의 아들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556년(명종 11)의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곧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561년 강원도도사가 된 이래 오랫동안 외직을 역임하였다.

    1566년 풍덕군수로서 이 군의 민폐를 열거하면서 국가행정전반에 걸친 개혁을 요구하는 장문의 소를 올렸다.

    1576년(선조 9)일시 사성이 되었으나 곧 외직에 나갔고, 임진왜란중에는 안주·양주의 목사를 역임하다가 1598년 호조참의가 되어 전라도에 파견되어 군량미조달에 공을 세웠다.

    기묘사림파 약빙(若氷)의 손자인 관계로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직으로만 돌아 중용되지 못하였으나 지방 통치에서 민심을 얻어 명성이 높았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己卯錄, 燃藜室記述. 〈朱雄英〉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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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9(성종 10)∼1523(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거(仲擧), 호는 송헌(松軒). 파주목사 순언(純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일찍이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많은 고전을 섭렵하였다. 지기(志氣)가 높고 절조가 있어 추앙을 받았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사(蔭仕)로 입사하여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과 음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관직을 버리고 전원에 돌아와서 소나무 수천 그루를 뒷산에 심고 가꾸었으며,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

    1520년 김안국(金安國)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천(利川)에 우거하고 있을 때 10리 거리를 두고 서로 내왕하면서 시와 풍류를 즐겼다. 김안국이 몇 번이나 다시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은사(隱士)로서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權五虎〉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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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4(영조 20)∼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실학자·천주교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덕형(德馨)의 7대손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홍낙민(洪樂敏)과는 사돈간이 되며 교우가 두터웠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그뒤 현감까지 지내다가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이 되었고, 이어 검상·승지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부윤으로 나갔다.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청나라에 가는 기회에 천주교 교리와 직접 접하게 되었고, 귀국하여 이가환·이벽(李檗) 등과 함께 사귀었다. 이벽과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과 그 질서, 인간영혼과 후세상벌에 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서학의 교리를 토론하였는데, 결국 이 토론에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하였고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겉으로는 남인공서파(南人攻西派)와 친분을 가짐으로써 서학 반대자로서 자처하였다. 이후 병조참판·우승지·한성부우윤을 거쳐 1801년(순조 1)에는 대사간·예조참판·좌승지를 역임하였다.

    특히, 안정복(安鼎福)은 그가 천주학에 빠져 들어가자 장문의 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 총억(寵億)이 신자였던 관계로 반대파들은 그를 이른바 사학(邪學)의 교주라고 비난하였고, 그 자신도 친국소에서 무답으로 응하였기 때문에 단천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신원,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복암유고》가 있으며, 편서로는 《한음문고부록 漢陰文稿附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推案及鞫案, 順菴集, 闢衛編(李基慶)
    Histoire de L’eglise de Coree(Dallet, C. C., Paris, 1874). 〈金玉姬〉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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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默軒公 (諱 萬運, 字 希元)은 1736年 校理公의 玄孫으로 出生하셨다. 

     

    李退溪, 鄭寒岡, 李石潭으로 이어지는 學脈과 李退溪, 金鶴峯, 張敬堂, 李葛庵, 金齎山(외조부)로 이어지는 學脈의 兩脈을 두루 兼한 正統性理學의 面貌를 갖춘 學者이며, 한편 天文, 曆法, 敎學등의 當時 雜學을 穿鑿(천착)한 朝鮮後期의 科學發展에 寄與한 嶺南士林의 泰山北斗 같은 存在였다. 公은 41歲 늦은 나이에 科擧에 應試하여 生員이 되고 이어 大科에 及第하였다.

     

    그러나 時節에 막혀서 십여년을 집에 계셨는데 1790年에 司饔院主簿, 咸鏡道都事, 禮曹佐郞등의 官職을 연이어 除授 받았으나 모두 謝絶한 후 學問에만 專念하셨다. 正祖는 特旨로 公을 司憲府持平의 官職을 내리니 이때 公의 나이는 61歲였다. 九旬老父의 奉養을 理由로 中央 官署의 벼슬을 사양하시니 正祖는 마지못해 許諾하면서 鄕里에 가까운 安義縣監을 除授 하셨다.

     

    公은 安義縣監으로 善政을 베풀었으며, 65歲에 司諫院正言을 除授 받았으나, 때마침 正祖께서 逝去하시니 上京하여 哭하고는 故鄕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公의 論文에는 皇極經文釋義(황극경문석의), 朞三百註解(기삼백주해), 月行會日圖(월행회일도), 則河圖劃卦設(즉하도획괘설), 元會運世數解(원회운세수해), 體數用數 六氣圖(체수용수 육기도), 納音圖(납음도), 經世四象體用之數圖(경세사상체용지수도 ) 등 數 篇이 있다.

     

    이것은 正統性理學에 관한 公의 論文인 心經發揮記疑(심경발휘기의), 啓蒙攷疑(계몽고의 )등에 못지 않은 比重을 가진 것으로서 아직 제대로 內容糾明이 되지는 않았으나, 朝鮮後記 科學史硏究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公께서 純祖 20년에 逝去하시니 享年 85歲이셨다. 文集은 默軒文集 8卷이 있다. 墓所는 漆谷郡 倭館邑 石田里 錧基 默軒宗宅 앞 艮坐 合窆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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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겸(伯謙). 한원군(漢原君) 수철(守哲)의 후손이며, 서복(瑞復)의 아들이다, 서징(瑞徵)에게 입양되었다.

    광주(廣州) 출신으로,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62년 장헌세자(莊憲世子)가 창덕군 선인문(宣仁門) 안뜰에서 영조의 친국을 받고 뒤주에 갇힐 때에 가주서로서 배종하여 의관(醫官)을 불러들이고 왕세손(뒤의 정조)을 몰래 장헌세자와 대면시키는 등 설서 권정침(權正忱), 한림 임덕제(任德躋), 사서 임성(任珹)과 함께 장헌세자의 구명에 힘썼다. 관직은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1899년에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待闡錄. 〈朴光用〉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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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5(숙종 11) ∼ 1761(영조 37) 자는 초백(楚白), 호는 서헌(恕軒), 병조 좌랑(兵曹佐郞) 기명(基命)의 아들.

    1720년(숙종 4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남인(南人)에 속했으므로 벼슬길에 전망이 보이지 않아 대과(大科) 응시를 포기했다. 학문은 특히 예학(禮學)이 뛰어났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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