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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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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중종 13)∼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 호는 과재(果齋). 병조판서 윤경(潤慶)의 아들이다.

    1539년(중종 34)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년)을사사화에 연루된 이휘(李輝)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 갑산에 유배되고, 1547년 사사되었다. 용모가 준수하고 태도가 의젓하여 조정에 있을 때 이황(李滉)에게 인정을 받았고, 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 등과 친교를 맺었다. 선조 때 신원되었다.

    편서로 《을사전문록 乙巳傳聞錄》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李貞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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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중종 12)∼156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숙희(叔喜). 영부(英符)의 아들이며, 명종 때 장령을 지낸 수경(首慶)의 동생이다.

     

    1546년(명종 1)생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48년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정언·부수찬을 역임하고, 1550년에는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고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2년 헌납에 승진되고 다음해 대사간을 거쳐, 1561년 예조참의·부제학이 되었다. 그뒤 1563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윤원형(尹元衡)의 소윤파가 득세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자, 이를 내심 두려워한 명종은 이량(李樑)으로 하여금 이를 대적하게 하려고 총애를 베풀어 이조판서 벼슬까지 주었으나 그는 많은 심복을 거느리고 흉악한 모의를 하다가 그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그의 죄를 탄핵하니 1563년 결국 이량은 강계로 귀양가고 간신들도 멀리 귀양갔다. 이때 그도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으나 1565년 풀려나와 부호군에 임명되었지만 그 이튿날 다시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명종 때에는 청백리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趙楨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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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5(중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중(士重), 호는 급고자(汲古子). 자(滋)의 손자로 좌통례(左通禮) 약빙(若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언승(洪彦昇)의 딸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공조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546년(명종 1)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대윤파의 여당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윤파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을 빌미로 정미사화를 일으킴에 따라 그의 아버지가 대윤파라 하여 사사(賜死)되고, 그도 연좌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1549년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생 홍윤(洪胤)이 조정을 비난하는 말을 하자, 동생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처형당하게 하였다.

    이해 동생의 모반을 고발하였다는 공으로 소환되어 장단부사로 있을 때 백성을 학대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1561년 공조참의로 다시 기용되고, 1569년(선조 2) 동생을 무고한 사실이 분명하여 삭직되었다.

    저서로는 《급고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趙啓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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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7(중종 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성(希聖). 고려의 문신인 집(集)의 5대손으로 증참판 남(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승원(李承元)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곤궁하였으나 뜻을 세우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홍문관정자에 선임되고 이듬해에 다시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왕의 사랑을 받아 박사·수찬·정언·지평 등을 지냈으며, 1544년 시독관(侍讀官)·교리를 거쳐 사복시정에 승진되어 이듬해에 《중종실록》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같은해 응교·사간 등을 역임하였고, 응교로 있을 때에 명종의 즉위와 함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아 지방관과 한직으로 밀려나 9년을 지냈다. 다시 등용되어 교리·직제학·승지·종부시정·이조참의·형조참의·한성부우윤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62년(명종 17)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1567년 첨지중추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68년(선조 1)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 편찬을 지휘하였다.

    그뒤 파직되었다가 1570년 서용되어 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다. 경연에 나아가 시강할 때에는 풍부한 학식과 청량한 음성으로 왕의 칭상(稱賞)을 받았으며, 옥사를 다스릴 때에는 판결이 분명하여 변동함이 없어 법정이 숙연하였다.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민폐를 덜고 생활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한다. 태종의 외예(外裔)라 하여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宋子大全. 〈金龍國〉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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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1(연산군 7) ∼ 1558(명종 13) 자는 자윤(子潤), 부사과(副司果) 양필(良弼)의 아들.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8년(명종 3) 전적(典籍)이 되고, 사인(舍人)·집의(執義)를 역임, 봉상시정(奉尙寺正)에 이르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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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는 혜환재, 기(沂)의 아들, 가환(家煥)의 아버지.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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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권력이 옮겨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할아버지는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다.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사되었으며 그도 이에 연좌되어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李延慶)과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 일파에 밀려 파직당했다.

    이후 문밖 출입을 끊고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정진했다.

    1537년에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직제학·승정원승지·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0년 정적(政敵)이었던 이기(李芑)의 탄핵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복귀했다.

    1553년에 함경도순변사로서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을묘왜변 때는 전라도도순찰사로서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와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1558년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기간에 국정을 주도하여, 척신 윤원형(尹元衡)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1572년(선조 5) 국가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遺疏)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朋黨)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현실화되었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東皐遺稿〉·〈조선풍속 朝鮮風俗〉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黨議通略, 朝鮮名人傳(申奭鎬外, 朝光社, 1939). 〈申解淳〉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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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8(연산군 4)∼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길(重吉), 호는 숭덕재(崇德齋). 세좌(世佐)의 손자로, 수찬 수정(守貞)의 아들이며, 준경(浚慶)의 형이다.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 수정이 화를 입자 연루되어 전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유배중에 어머니로부터 《효경》·《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역임하고, 사간원·사헌부로 옮겨 정언·사간·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하였고, 인종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대윤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하여졌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서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하여 〈운간이사군 雲間李使君〉이라는 노래로 치하하였다.

    이때 아들 중열(中悅)이 이덕응사건(李德應事件)에 몰려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1550년(명종 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용서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하여야겠다.”고 하여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끝이라 몸이 허약하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하여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公館)에서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崔完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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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6(성종 17)∼1531(중종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지원(止源), 호는 우천(牛泉). 충주출신. 현감 자(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고, 1518년 성수침(成守琛)·서경덕(徐敬德) 등과 현량과(賢良科)에 별천(別薦)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소두(疏頭)로서 성균관의 유생 150여명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항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윤언직(尹彦直)·홍순복(洪舜福)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1521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10년 만인 1531년에 예산으로 이배, 같은해 8월 그곳에서 죽었다.

    1605년(선조 38)에 설원(雪寃)되었고, 1708년(숙종 34) 대흥현(大興縣) 우정사(牛井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천유고》 1책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牛泉遺稿. 〈權虎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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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8(연산군 4)∼1546(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용(景容), 호는 수암(首巖). 현감 자(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光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를 거쳐,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녹사가 되고, 1538년 병조좌랑으로 탁영시(擢英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종학교수(宗學敎授)가 되었다.

    1543년 선위사(宣尉使)로 일본 사신을 맞아 교역관계를 의논하였고 보덕(輔德)을 거쳐 1545년(인종 1) 전한(典翰)으로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을 거쳐, 직제학에 올랐다.

    이해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장악하자 대간의 탄핵을 받아 나주목사로 체직되었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尹任)의 일파로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추대에 가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삭탈관직된 뒤 장흥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원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고 가사전토(家舍田土)가 모두 소윤일파에 분급되었다.

    그뒤 1550년 대간에 의한 신원운동과 1568년(선조 1) 삼공(三公)에 의한 계청으로 신원되어 직첩과 가산을 되돌려 받았다. 전라북도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李文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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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9(성종 20)∼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초(熹初), 호는 준암(樽巖). 현감 자(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光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1508년(중종 3) 왕이 성균관에 들러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를 하사받았고, 1513년 수석으로 생원에 합격한 뒤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 공조정랑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19년 이조정랑으로 재직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형인 약수(若水)가 동료 유생 150여명을 이끌고 조광조의 신원을 호소하다가 옥에 갇히매 조광조와 약수의 사면을 주청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뒤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로 있으면서 1539년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을 청하다가 잡혀 들어와 삭직당하였다. 그리하여 충주 북촌(北村)에 가서 살면서 스스로 호를 준암이라 하였다.

    그뒤 1543년 경기도의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수원부사·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내다가, 1547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재직하던 중 소윤인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이 정언각(鄭彦殼)의 양재역(良才驛)의 벽서고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일파를 모두 숙청할 때 대윤 윤임의 인척이라 하여 처형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그뒤 1570년(선조 3)에 신원되어 복직되었고, 몰수당하였던 가산을 돌려받았다. 대흥(大興)의 우천사(牛川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金成俊〉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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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4(성종 15)∼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의 손자이며, 도사 수원(守元)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518년 방환(放還)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하여 ‘원사인자손(寃死人子孫)’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고,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하였을 때 재상을 선출하는 문제가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일파의 인력(引力)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하여,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하였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귀양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공주에 물러가 살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그의 문하가 되었다.노수신(盧守愼)·강유선(康維善)·심건(沈鍵)은 그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팔봉서원(八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大東野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朝鮮前期畿湖士林派硏究(李秉烋, 一潮閣, 1984). 〈崔完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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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4(세조 10)∼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평(仲平).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이며, 군수 세충(世忠)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6년(성종 17)진사에 오르고, 1488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전적·정언이 되었다.

    1490년 외방사사전(外方寺社田)을 감축하여 향교에 급여하도록 하고, 1494년 형조정랑·교리·문학·봉상시첨정을 거쳐, 1497년(연산군 3)장령·응교 그리고 사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를 만나 난언(亂言:弔義帝文을 말함.)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도 창성(昌城)에 유배되고, 이어 전라도 광양에 이배되었다가 1501년 풀려 나왔다.

    1504년 갑자사화를 만나 폐비 윤씨의 묘를 이장할 당시 도감의 설치를 반대하였다는 죄로 참살되었다.

    1508년(중종 3)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海東野言, 海東雜錄, 燃藜室記述.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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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7(세조 3)∼1495(연산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미(士美). 아버지는 좌찬성 손(蓀)이다.

    1477년(성종 8)진사에 오르고, 148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주서(注書)·형조좌랑·예조좌랑·지평을 거쳐, 충청도도사·호조정랑을 역임하고 1490년에 장령에 올라, 사사전세(寺社田稅)의 관수관급(官收官給)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1491년에 야인이 변경지방을 침범하자, 왕은 허종(許琮)을 도원수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허종은 문무재략(文武才略)을 겸비한 자로서 군무를 보좌할 인물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발탁되어 성균관사예로 전직되고 곧 종사관으로 종군, 전공을 세워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제수받았다.

    1494년 집의로 등용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가, 조정에서 장차 서계(西界)에 둔전을 설치, 방수(防戍)를 계획하게 되자, 그 적임자로 발탁되어 교리로 기용, 파견되었다. 둔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해주에서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容齋集(李荇).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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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5(세종 27)∼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맹언(孟彦).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대사간으로 특채되고, 1485년에 이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광양군(廣陽君)의 봉호를 받았다.

    1494년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陵)축조를 담당하였으며, 이어 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순변사로 여진족의 귀순처리와 회유책의 강구를 위하여 북방에 파견되었다.

    1497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 및 그 제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예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養老宴)에 참석, 어사주를 회배(回盃)할 때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른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무안에 부처되었다가 다시 온성·평해에 이배되었다.

    이듬해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하여 다시 거제에 이배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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