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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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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1459(세조 5). 조선 초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계윤(季胤) 증조할아버지는 광주 향리인 이당(李唐)이며 할아버지는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아버지는 보문각 직제학을 지낸 이지직(李之直)이고 어머니는 주지사 이원보(李元普)의 딸이며 이들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송화(松禾)현감을 지낸 밀양인 박서(朴曙)의 딸이었다.

    [활동사항]
    1434년(세종 16)에 생원의 자격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내금위 사인으로 출발하여 1440년(세종 22)에 사헌부 지평으로서 김하(金何)가 간음한 사실을 탄핵하였다.

    1444년(세종 26)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수원부사에 임명되었다. 수원부사로 근무 중에 명 사신을 벽제관에서 잘 응대하여 외관승진 논의가 있기도 하였다. 단종 때에 좌사간대부로 보임되었고 1457년(세조 3)에 황해감사로 승진하였으며, 세조 즉위에 협조한 공로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459년(세조 5) 3월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죽었다.

    [기타]
    사평(史評)에 성격이 강개하고 곧았다고 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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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 ]

     

    1395(태조 4)∼1463(세조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 참의 지직(之直)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검열에 발탁되었다. 그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1429년(세종 1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형조좌랑·예조좌랑·집의·판군자감사·예조참의·경상도관찰사·형조참의·대사헌·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는 한성부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형조참판을 거쳐, 1454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잡게 되자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봉하여졌다. 이어서 판중추부사로서 판호조사를 겸임하고 우찬성을 거쳐 1459년(세조 5) 우의정에 오른 뒤 곧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申解淳〉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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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생몰년 미상. 조선 태종 때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맹윤(孟胤)이다. 고려 때 학자인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손자이며,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에 이르렀다. 30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묘자리를 살피고 있었는데 풍수를 보는 지사(地師)가 자리를 정하고는 좋은 자리임에는 틀림없으나 장자에게 나쁘다는 말을 하였다. 동생 이인손(李仁孫)이 이곳에 장사할 것을 만류하였는데 이를 뿌리치고 안장하였다. 지사의 말을 듣지 않았던 그는 이듬해 죽었다. 뒤에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
    묘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광주이씨 선영에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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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號)는 암탄(巖灘).


    고려말(高麗末)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고 형 양중(養中)과 함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抗節臣)으로 조선조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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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자정(子精), 호(號)는 석탄(石灘),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 후 은거하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므로 태종이 수차 방문하여 부임을 종용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죽은 뒤 광주(廣州)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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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숙명(叔明),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아들.


    1389년(공민왕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어 문과에 급제, 사간(司諫)·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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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3(공민왕 12)∼1427(세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잠(仲潛).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한 집(集)의 아들이다.

    1382년(우왕 8)과거에 급제, 중서문하성의 녹사(錄事)를 거쳐, 1392년(태조 1) 기거주(起居注)로서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으로서 활약하여 1393년 정도전(鄭道傳)일파에 의하여 탄핵,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이방원이 즉위하여 정권을 잡자 사헌부장령으로서, 풍기단속과 공신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1407년(태종 7)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직제학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전토 40결을 하사받았다. 이어서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역임하였고, 창업 초기의 궁궐 수축에 힘썼으며, 외직으로 수원부사가 되어 민정을 직접 다스리기도 하였다.

    1411년 예조우참의로서 충청도·전라도 경차관에 임명되어 민정을 순찰, 전라도수군도절제사 홍유룡(洪有龍), 임실감무 최참(崔漸), 당진감무 임을생(任乙生)의 탐학을 밝히고 이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뒤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416년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19년 세종이 즉위하자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도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체계를 바로하는 데 힘썼다.

    1420년(세종 2)호조판서, 이어서 예조판서·대사헌·의정부참찬을 지내고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나, 곧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하였으며, 특히 재정 부서에 오래 근무하였음에도 결코 축재에 관심이 없었다. 문장에 능하였고, 행정업무에 있어 결단력이 있었다. 후사가 없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李存熙〉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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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1354(공민왕 3)~1419(세종 1). 여말선초의 문신, 유학자.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평(伯平)이고, 호는 탄천(炭川)이다. 아버지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집(李集)이며, 할아버지는 이당(李唐), 증조할아버지는 이울(李蔚)이다.

    [활동사항]
    고려말과 조선초의 정치적 격변기에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1380년(우왕 6) 전구서승(典廐署丞)으로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고, 한림, 교리를 거쳐 관동과 호서지방의 관찰사를 지냈다.

    1398년(태조 7) 보문각직제학 재임시 소도의 변란이 있자,이를 극렬히 간하다 화를 입었다. 이때 태종 이방원과 변춘정(卞春亭)이 그를 강력히 변호하여 금고(禁錮)의 처벌만 받게 되었다. 이후 광주(廣州)의 탄천(炭川)에 은거하며 독서를 일삼았는데, 배우려 오는 사람이 모두 ‘탄천선생’이라 하였다.

    태종이 말년에 세종에게 다시 등용하라고 당부하여 말하니, 세종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형조 우참의(右參議)에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후일 청백리에 올랐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
    묘는 중원구 하대원동 산3-1에 있다. 이지직의 묘는 태조사 부근 이극돈의 묘 왼쪽의 나지막한 능선에 위치해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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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 :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대원리 묘좌 (지금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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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촌선생 유적비 : 시조 당(唐_둔촌선생 아버지) 할아버지의 묘소 입구인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위치하고 있다.  

     

     

    1314(충숙왕 1)∼1387(우왕 13).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당(唐)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遁村遺稿. 〈崔根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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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문학에 통달했다. 특히 이항복(李恒福)과는 죽마고우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이(李珥)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과 함께 뽑혀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다음해 서총대(瑞蔥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다이라[平義智]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591년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피난했는데,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이르자 단독으로 일본의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했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파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명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대사헌으로서 이들을 맞아들였으며, 이어 한성판윤에 올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했다. 1595년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

    이해에 우의정에 오른 뒤 다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이항복의 진언으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힘썼고, 다음해 영의정이 되었다.

    1606년 영중추부사의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명나라가 왕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박응서(朴應犀)의 상변(上變)으로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과 함께 이에 적극 반대했다.

    그뒤 광해군이 그의 주청에 따라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자 삼사가 모두 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했다. 그뒤 용진(龍津)으로 돌아가 병으로 죽자 광해군이 애도하여 복관을 명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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