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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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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이씨의 역사적인물들입니다.

    광주이씨의 역사적인물들이 어떤분들인지 확인하시는 좋은 곳입니다..

    자주 봐 주세요..

    작성자[홈:귀암]_광호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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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35년 (중종30). 자는 사임(士任)으로 품계가 승사랑(承仕郞)에 이르렀다.

    광주이씨 칠곡파의 입향조이다. 부친 극견(克堅)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재임하고 있을때 인근에 사는 영천최씨 최하(崔河)의 무남독녀와 결혼하면서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들로는 덕부(德符), 인부(仁符)를 두었다. 묘소는 칠곡군 지천면(枝川面) 주봉산(主峯山)에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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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문학에 통달했다. 특히 이항복(李恒福)과는 죽마고우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이(李珥)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과 함께 뽑혀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다음해 서총대(瑞蔥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다이라[平義智]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591년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피난했는데,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이르자 단독으로 일본의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했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파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명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대사헌으로서 이들을 맞아들였으며, 이어 한성판윤에 올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했다. 1595년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

    이해에 우의정에 오른 뒤 다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이항복의 진언으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힘썼고, 다음해 영의정이 되었다.

    1606년 영중추부사의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명나라가 왕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박응서(朴應犀)의 상변(上變)으로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과 함께 이에 적극 반대했다.

    그뒤 광해군이 그의 주청에 따라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자 삼사가 모두 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했다. 그뒤 용진(龍津)으로 돌아가 병으로 죽자 광해군이 애도하여 복관을 명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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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1354(공민왕 3)~1419(세종 1). 여말선초의 문신, 유학자.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평(伯平)이고, 호는 탄천(炭川)이다. 아버지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집(李集)이며, 할아버지는 이당(李唐), 증조할아버지는 이울(李蔚)이다.

    [활동사항]
    고려말과 조선초의 정치적 격변기에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1380년(우왕 6) 전구서승(典廐署丞)으로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고, 한림, 교리를 거쳐 관동과 호서지방의 관찰사를 지냈다.

    1398년(태조 7) 보문각직제학 재임시 소도의 변란이 있자,이를 극렬히 간하다 화를 입었다. 이때 태종 이방원과 변춘정(卞春亭)이 그를 강력히 변호하여 금고(禁錮)의 처벌만 받게 되었다. 이후 광주(廣州)의 탄천(炭川)에 은거하며 독서를 일삼았는데, 배우려 오는 사람이 모두 ‘탄천선생’이라 하였다.

    태종이 말년에 세종에게 다시 등용하라고 당부하여 말하니, 세종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형조 우참의(右參議)에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후일 청백리에 올랐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
    묘는 중원구 하대원동 산3-1에 있다. 이지직의 묘는 태조사 부근 이극돈의 묘 왼쪽의 나지막한 능선에 위치해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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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5년 (선조 28) ~ 1659 (현종즉위).

    자는 태유(泰有), 호는 한죽정(寒竹亭)이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에게 나아가 배웠다. 관직은 처음에 의금부도사(義禁莩事)를 역임하였고, 병자호란때에는 국왕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시자 의병을 일으켜서 김식(金湜)등과 함께 조령(鳥嶺)을 방어하였다고 한다.

    이후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는 고향에 머물렀다고 한다.



    ■ 한죽정일기(寒竹亭日記) ■

    이윤우의 아들인 이도창이 남긴 일기로 매년 한 책씩 써 나갔는데, 현재 9책이 남아있다. 작성시기는 1639년부터 1659년까지인데, 중간에 유실된 부분이 있으며, 현재는 9년분이 남아있다.
    현전하는것은 1639년, 1642년, 1643년, 1645년, 1650년, 1653년, 1655년, 1656년, 1659년때의 것이다.

    이 일기는 표지에 '임오일과(壬午日課)', '계사일과(癸巳日課)' 처럼 쓴 시기만 기록하고 있다. 본문 내용은 통상적인 양반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특징적인 사항은 간혹 도서의 겉 장 안쪽에 '기신(忌辰)' 이라고 하여 이 집안의 제사 지내는 규정을 기록하여 두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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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9년(인조 7) ~ 1688년(숙종15).

    자는 사흥(士興). 호는 박곡(朴谷). 이도장(李道長)의 아들이다.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51년 생원시에 장원, 166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형조·병조정랑을 거쳐 의주부윤, 호조·병조참의, 좌우승지, 예조·호조참판, 한성우윤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는등 승지 9차례와 대사헌 5차례를 역임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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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 :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대원리 묘좌 (지금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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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촌선생 유적비 : 시조 당(唐_둔촌선생 아버지) 할아버지의 묘소 입구인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 위치하고 있다.  

     

     

    1314(충숙왕 1)∼1387(우왕 13).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당(唐)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遁村遺稿. 〈崔根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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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2(세종 4)∼1495(연산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峰).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부정자로 보임되고, 이어 감찰이 되었으며, 검찰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정언·지제교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지난번 명나라에 갔을 때 검찰직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어 병조 겸 좌랑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세조가 즉위하는 데의 공이 인정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1457년(세조 3) 예조참의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어 광릉군(廣陵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병조참판과 예조참판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1459년 북변의 야인정벌 때 신숙주(申叔舟)의 종사로 출전하였고, 돌아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 이래 호조·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는 평안도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선무하여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어 평안도관찰사에 올랐다.

    예종 때에는 우참찬이 되고, 이어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었으며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올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481년부터 2년 동안의 대기근이 발생하였을 때에 진휼사(賑恤使)로서 활약하였으며, 겸판호조사(兼判戶曹事)가 되었다.

    1485년 우의정이 되었고, 1493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을 구실로 사양하였으며, 다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뜻과 생각이 견고하였다. 경학으로 근본을 삼고 행정의 재능을 겸하였다.

    오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사사로이 손님을 맞지 않았으며, 가무(歌舞)는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나라의 일을 의논하는 데 대체적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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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중고(仲固), 관찰사(觀察使) 예손(禮孫)의 둘째 아들.

    조선조에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거쳐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역임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종반(從班) 숙질(叔侄) 등이 참화(慘禍)를 당(當)하자 처가(妻家) 고장인 전북 옥구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며 여생을 보냈다.

    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增職)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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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방형(邦衡).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무술에도 뛰어남으로써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이 되었다.

    1459년 성균관주부를 거치고, 이어 회령도사·지평, 도체찰사의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김구(金龜)·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교정손자주해 校正孫子註解》를 찬하였다.

    1467년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滿浦節制使)가 되었고, 건주위 정벌의 군공으로 3등 공신이 되어 노비 6구(口)를 하사받았다.

    1469년(예종 1)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472년(성종 3)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147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7년 영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7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48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평안도절도사·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대사헌을 거쳐 1486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의금부당상·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 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경변사(警邊使)로 나아가고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좌의정 성준(成俊)과 함께 《서북제번기 西北諸蕃記》와 《서북지도 西北地圖》를 편찬하였다.

    1502년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왕에게 상소하였으며, 1503년 좌의정이 되었다. 여러 차례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갑자사화 때 조카 세좌(世佐)와 함께 연루되어 인동(仁同)으로 귀양가서 사사되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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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 ]

     

    1395(태조 4)∼1463(세조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 참의 지직(之直)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검열에 발탁되었다. 그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1429년(세종 1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형조좌랑·예조좌랑·집의·판군자감사·예조참의·경상도관찰사·형조참의·대사헌·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는 한성부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형조참판을 거쳐, 1454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잡게 되자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2등에 봉하여졌다. 이어서 판중추부사로서 판호조사를 겸임하고 우찬성을 거쳐 1459년(세조 5) 우의정에 오른 뒤 곧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申解淳〉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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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1459(세조 5). 조선 초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계윤(季胤) 증조할아버지는 광주 향리인 이당(李唐)이며 할아버지는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아버지는 보문각 직제학을 지낸 이지직(李之直)이고 어머니는 주지사 이원보(李元普)의 딸이며 이들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송화(松禾)현감을 지낸 밀양인 박서(朴曙)의 딸이었다.

    [활동사항]
    1434년(세종 16)에 생원의 자격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내금위 사인으로 출발하여 1440년(세종 22)에 사헌부 지평으로서 김하(金何)가 간음한 사실을 탄핵하였다.

    1444년(세종 26)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수원부사에 임명되었다. 수원부사로 근무 중에 명 사신을 벽제관에서 잘 응대하여 외관승진 논의가 있기도 하였다. 단종 때에 좌사간대부로 보임되었고 1457년(세조 3)에 황해감사로 승진하였으며, 세조 즉위에 협조한 공로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459년(세조 5) 3월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죽었다.

    [기타]
    사평(史評)에 성격이 강개하고 곧았다고 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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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광양군(廣陽君) 세좌(世佐)의 5대손이다.

    숙종 때 부사를 지냈으며, 무신란(戊申亂:李麟佐의 亂)이 일어났을 때 운량도감(運糧都監)이 되어 그의 두 아들 자간(自侃)·여간(汝侃)과 도모하여 양곡을 모아 군소(軍所)에 보냈고, 의사(義士)들과 더불어 운봉(雲峯)의 팔량치(八良峙)를 지킴으로써 난군이 넘지 못하게 하였다.

    운봉의 천총(千摠) 정준교(鄭俊僑)와 함께 함양에 들어가, 난을 일으킨 최존서(崔存緖)·허격(許格)을 생포하여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湖南三綱錄. 〈禹仁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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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1(연산군 7) ∼ 1558(명종 13) 자는 자윤(子潤), 부사과(副司果) 양필(良弼)의 아들.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8년(명종 3) 전적(典籍)이 되고, 사인(舍人)·집의(執義)를 역임, 봉상시정(奉尙寺正)에 이르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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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해수, 호는 북악(北嶽).

    1588년(선조 21) 사자관(寫字官)으로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많은 필적을 남겼으며 임진왜란 때는 역관(譯官)으로 일본과의 화의 교섭에 종사했다.

    159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602년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에 이르렀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 김 상(金 相)으로부터 한 호(韓 濩)에 필적하는 명필이라고 격찬을 받았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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