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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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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9(세종 21)∼1520(중종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방(子芳).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수철(守哲)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의 딸이다.

    1459년(세조 5)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문은 물론 활쏘기·말타기를 잘 하여 왕명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1470년(성종 1)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을 역임하고, 김해부사·판교(判校)를 거쳐, 1492년 장례원판결사, 이어 충청도·함경도절도사, 충청도·황해도·전라도관찰사, 부제학·우부승지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한성부좌윤·우윤, 이조·예조참판을 거쳐, 형조·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 3등으로 한산군(漢山君)에 봉하여지고, 우참찬으로 승진하였다.

    1508년 좌참찬 재임시 재덕(才德)이 없고 늙음을 핑계로 치사(致仕)를 요청하였으나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뒤 우찬성·좌찬성을 역임하고, 1512년 일본의 화호(和好)요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513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영의정 유순(柳洵), 판서 안침(安琛) 등 남학(南學)의 친우들과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서로 왕래하며 즐겼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容齋集(李荇).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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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4(세조 10)∼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평(仲平).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이며, 군수 세충(世忠)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6년(성종 17)진사에 오르고, 1488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전적·정언이 되었다.

    1490년 외방사사전(外方寺社田)을 감축하여 향교에 급여하도록 하고, 1494년 형조정랑·교리·문학·봉상시첨정을 거쳐, 1497년(연산군 3)장령·응교 그리고 사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를 만나 난언(亂言:弔義帝文을 말함.)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도 창성(昌城)에 유배되고, 이어 전라도 광양에 이배되었다가 1501년 풀려 나왔다.

    1504년 갑자사화를 만나 폐비 윤씨의 묘를 이장할 당시 도감의 설치를 반대하였다는 죄로 참살되었다.

    1508년(중종 3)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海東野言, 海東雜錄, 燃藜室記述.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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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7(세조 3)∼1495(연산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미(士美). 아버지는 좌찬성 손(蓀)이다.

    1477년(성종 8)진사에 오르고, 148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주서(注書)·형조좌랑·예조좌랑·지평을 거쳐, 충청도도사·호조정랑을 역임하고 1490년에 장령에 올라, 사사전세(寺社田稅)의 관수관급(官收官給)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1491년에 야인이 변경지방을 침범하자, 왕은 허종(許琮)을 도원수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허종은 문무재략(文武才略)을 겸비한 자로서 군무를 보좌할 인물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발탁되어 성균관사예로 전직되고 곧 종사관으로 종군, 전공을 세워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제수받았다.

    1494년 집의로 등용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가, 조정에서 장차 서계(西界)에 둔전을 설치, 방수(防戍)를 계획하게 되자, 그 적임자로 발탁되어 교리로 기용, 파견되었다. 둔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해주에서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容齋集(李荇).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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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4(성종 15)∼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의 손자이며, 도사 수원(守元)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518년 방환(放還)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하여 ‘원사인자손(寃死人子孫)’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고,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하였을 때 재상을 선출하는 문제가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일파의 인력(引力)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하여,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하였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귀양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공주에 물러가 살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그의 문하가 되었다.노수신(盧守愼)·강유선(康維善)·심건(沈鍵)은 그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팔봉서원(八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大東野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朝鮮前期畿湖士林派硏究(李秉烋, 一潮閣, 1984). 〈崔完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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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默軒公 (諱 萬運, 字 希元)은 1736年 校理公의 玄孫으로 出生하셨다. 

     

    李退溪, 鄭寒岡, 李石潭으로 이어지는 學脈과 李退溪, 金鶴峯, 張敬堂, 李葛庵, 金齎山(외조부)로 이어지는 學脈의 兩脈을 두루 兼한 正統性理學의 面貌를 갖춘 學者이며, 한편 天文, 曆法, 敎學등의 當時 雜學을 穿鑿(천착)한 朝鮮後期의 科學發展에 寄與한 嶺南士林의 泰山北斗 같은 存在였다. 公은 41歲 늦은 나이에 科擧에 應試하여 生員이 되고 이어 大科에 及第하였다.

     

    그러나 時節에 막혀서 십여년을 집에 계셨는데 1790年에 司饔院主簿, 咸鏡道都事, 禮曹佐郞등의 官職을 연이어 除授 받았으나 모두 謝絶한 후 學問에만 專念하셨다. 正祖는 特旨로 公을 司憲府持平의 官職을 내리니 이때 公의 나이는 61歲였다. 九旬老父의 奉養을 理由로 中央 官署의 벼슬을 사양하시니 正祖는 마지못해 許諾하면서 鄕里에 가까운 安義縣監을 除授 하셨다.

     

    公은 安義縣監으로 善政을 베풀었으며, 65歲에 司諫院正言을 除授 받았으나, 때마침 正祖께서 逝去하시니 上京하여 哭하고는 故鄕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公의 論文에는 皇極經文釋義(황극경문석의), 朞三百註解(기삼백주해), 月行會日圖(월행회일도), 則河圖劃卦設(즉하도획괘설), 元會運世數解(원회운세수해), 體數用數 六氣圖(체수용수 육기도), 納音圖(납음도), 經世四象體用之數圖(경세사상체용지수도 ) 등 數 篇이 있다.

     

    이것은 正統性理學에 관한 公의 論文인 心經發揮記疑(심경발휘기의), 啓蒙攷疑(계몽고의 )등에 못지 않은 比重을 가진 것으로서 아직 제대로 內容糾明이 되지는 않았으나, 朝鮮後記 科學史硏究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公께서 純祖 20년에 逝去하시니 享年 85歲이셨다. 文集은 默軒文集 8卷이 있다. 墓所는 漆谷郡 倭館邑 石田里 錧基 默軒宗宅 앞 艮坐 合窆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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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5(중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중(士重), 호는 급고자(汲古子). 자(滋)의 손자로 좌통례(左通禮) 약빙(若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언승(洪彦昇)의 딸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공조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546년(명종 1)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대윤파의 여당을 제거하기 위하여 소윤파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을 빌미로 정미사화를 일으킴에 따라 그의 아버지가 대윤파라 하여 사사(賜死)되고, 그도 연좌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1549년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생 홍윤(洪胤)이 조정을 비난하는 말을 하자, 동생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처형당하게 하였다.

    이해 동생의 모반을 고발하였다는 공으로 소환되어 장단부사로 있을 때 백성을 학대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1561년 공조참의로 다시 기용되고, 1569년(선조 2) 동생을 무고한 사실이 분명하여 삭직되었다.

    저서로는 《급고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趙啓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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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의지(義之), 호는 율정(栗亭).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하여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진사에 합격하고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당시 진사의 위차가 생원의 아래에 있어 나이 많은 진사도 젊은 생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예조에 고쳐줄 것을 상계(上啓)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483년(성종 14) 성종이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방정한 인물을 널리 구할 때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을 받아 경연(經筵)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론하였다. 서거정(徐居正)·허종(許琮) 등의 석학은 물론, 성종도 그의 고매한 품위와 박식에 탄복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이때 성종이 높이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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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6(세종 28)∼1522(중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숭보(崇甫). 찰방 관의(寬義)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사예·사간원사간·성균관사성을 거쳐, 1499년(연산군 5)사헌집의·사도시정(司䆃寺正)을 역임하였다.

    1500년 초무부사(招撫副使)로 해랑도(海浪島)의 유민을 수색한 공으로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되고, 이듬해 홍문관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 등에 이르렀다.

    1503년 형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재직중 갑자사화에 연루,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508년 형조판서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해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를 지내고, 1512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515년 동지성균관사·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51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몸가짐이 염간(廉簡)하여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으로 일컬어졌으며, 성명(性命)의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천지·일월·성신의 도수에 환하였다. 시호는 문호(文胡)이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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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숙명(叔明),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아들.


    1389년(공민왕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이어 문과에 급제, 사간(司諫)·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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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6(성종 17)∼1531(중종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지원(止源), 호는 우천(牛泉). 충주출신. 현감 자(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고, 1518년 성수침(成守琛)·서경덕(徐敬德) 등과 현량과(賢良科)에 별천(別薦)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소두(疏頭)로서 성균관의 유생 150여명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항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윤언직(尹彦直)·홍순복(洪舜福)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1521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10년 만인 1531년에 예산으로 이배, 같은해 8월 그곳에서 죽었다.

    1605년(선조 38)에 설원(雪寃)되었고, 1708년(숙종 34) 대흥현(大興縣) 우정사(牛井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천유고》 1책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牛泉遺稿. 〈權虎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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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겸(伯謙). 한원군(漢原君) 수철(守哲)의 후손이며, 서복(瑞復)의 아들이다, 서징(瑞徵)에게 입양되었다.

    광주(廣州) 출신으로,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62년 장헌세자(莊憲世子)가 창덕군 선인문(宣仁門) 안뜰에서 영조의 친국을 받고 뒤주에 갇힐 때에 가주서로서 배종하여 의관(醫官)을 불러들이고 왕세손(뒤의 정조)을 몰래 장헌세자와 대면시키는 등 설서 권정침(權正忱), 한림 임덕제(任德躋), 사서 임성(任珹)과 함께 장헌세자의 구명에 힘썼다. 관직은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1899년에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待闡錄. 〈朴光用〉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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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8(연산군 4)∼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길(重吉), 호는 숭덕재(崇德齋). 세좌(世佐)의 손자로, 수찬 수정(守貞)의 아들이며, 준경(浚慶)의 형이다.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 수정이 화를 입자 연루되어 전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유배중에 어머니로부터 《효경》·《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역임하고, 사간원·사헌부로 옮겨 정언·사간·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하였고, 인종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대윤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하여졌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서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하여 〈운간이사군 雲間李使君〉이라는 노래로 치하하였다.

    이때 아들 중열(中悅)이 이덕응사건(李德應事件)에 몰려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1550년(명종 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용서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하여야겠다.”고 하여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끝이라 몸이 허약하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하여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公館)에서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崔完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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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장(李道長 1603년 : 선조36 ~ 1644년 : 인조22


    문신, 자는 태시, 호는 낙촌, 본관은 광주. 참의 윤우의 차자로서 영우에게 출계하였다.

    정한강 장여헌의 문인으로 1630년(인조 8)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정자에 등용되고 이어 주서, 검열, 사근도찰방, 지평 등을 거쳐 인조 16년에는 홍문록에 피선되고, 그 후 부수찬, 지평, 정언, 부교리, 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공은 학문이 뛰어나 인조 16년 12월, 지제교에 초선된후 교리, 헌납, 이조정랑, 사간, 부응교 등을 거쳐 합천군수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병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니 왕후비빈과 대신가족들은 이미 강화도로, 피난가고 적의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진격하여 옴에 당시 도제찰사 김유가 아무방비도 없이 국왕을 강화로 파천(播遷)할 것을 주청함에 공이 이를 반대하여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병력을 보내어 적병의 진격을 늦추게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파천을 하게 하되 혹시 도중에 어떤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 인군지인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강화의 안위를 확인한 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진언한 바있다.

    그 후 치욕적인 강화를 체결한 수 청의 진영에서 두 왕자를 인질로 하는 한편, 척화를 주장한 자의 명단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대신들은 서로 집필을 기피하여 공에게 권유하니 하는 수 없이 붓을 잡으니, 전후좌우에서 척화자의 명단을 빠짐없이 불렀으나 공은 삼학사의 이름만 쓰고는 붓을 놓고 강개한 태도로 말하기를 적의 요청은 사람의 수를 정한바 없는데 우리 스스로 많은 사람을 적어 더 많은 희생을 낼수는 없지 않느냐 하였다.

    이렇게 예리한 지혜로 결국은 많은 인명을 구한 일화가 있다. 1644년 향년 42세로 졸하니 좌찬성에 증직되고, 문집이 있다. 고령군 타산면 곽촌동에 묘소가 있으니 우의정 허목이 비문을 지었다.


    [문헌(文獻)]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칠곡부읍지(漆谷府邑誌), 거주지, 낙촌집(洛村集)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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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8(연산군 4)∼1546(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용(景容), 호는 수암(首巖). 현감 자(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光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를 거쳐,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녹사가 되고, 1538년 병조좌랑으로 탁영시(擢英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종학교수(宗學敎授)가 되었다.

    1543년 선위사(宣尉使)로 일본 사신을 맞아 교역관계를 의논하였고 보덕(輔德)을 거쳐 1545년(인종 1) 전한(典翰)으로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을 거쳐, 직제학에 올랐다.

    이해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장악하자 대간의 탄핵을 받아 나주목사로 체직되었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尹任)의 일파로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추대에 가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삭탈관직된 뒤 장흥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원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고 가사전토(家舍田土)가 모두 소윤일파에 분급되었다.

    그뒤 1550년 대간에 의한 신원운동과 1568년(선조 1) 삼공(三公)에 의한 계청으로 신원되어 직첩과 가산을 되돌려 받았다. 전라북도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典故大方. 〈李文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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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6(인조 24)∼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이조판서 원정(元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좌부승지 언영(彦英)의 딸이다.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어 봉상시봉사·승정원주서를 거쳐 홍주목사로 나갔다. 경신대출척으로 파직되어 아버지 원정의 유배지 초산에 따라갔다.

    1683년(숙종 9) 다시 복관되어 우승지·전라도관찰사·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진정(賑政)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도민들이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永思碑)를 세웠다.

    외직에 있을 때에 견문한 사실과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시폐를 들어 시정책을 강구한 상소를 올렸으며,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서전차의 書傳箚疑〉·〈기뇌홍 記雷虹〉 등 많은 잡저를 남겼고, 저서로는 《정재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靜齋文集. 〈權虎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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