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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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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0(명종 1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 좌찬성 극돈(克墩)의 후손이며, 우선(友善)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3년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으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 거상(居喪)을 극진히 함으로써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승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1608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이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소북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鄭仁弘)과 짜고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해 2월에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일약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권세를 장악한 그는 정인홍과 함께 자기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 진(臨海君珒)과 유영경을 사사하게 하는 등 소북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 태경(晋陵君泰慶) 등을 죽이고, 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 그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하게 하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하게 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이듬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당하였다. 아들 원엽(元燁)·홍엽(弘燁)·대엽(大燁)삼형제도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朝野輯要. 〈趙啓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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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생몰년 미상. 조선 태종 때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맹윤(孟胤)이다. 고려 때 학자인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손자이며,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에 이르렀다. 30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묘자리를 살피고 있었는데 풍수를 보는 지사(地師)가 자리를 정하고는 좋은 자리임에는 틀림없으나 장자에게 나쁘다는 말을 하였다. 동생 이인손(李仁孫)이 이곳에 장사할 것을 만류하였는데 이를 뿌리치고 안장하였다. 지사의 말을 듣지 않았던 그는 이듬해 죽었다. 뒤에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되었다.

    [묘소]
    묘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광주이씨 선영에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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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6(세조 12)∼1499(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수덕(樹德). 세우(世佑)의 아들이며, 약해(若海)의 아버지이다.

    1494년(성종 25)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이 점점 광포하여지자 경연에서 만날 때마다 풍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눈물을 흘리고는 하였다. 함창현감에 배수되어서는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시(詩)·예(禮)로 다스려 풍속이 변하였다.

    《성종실록》 편찬에 춘추관기사관으로 참여하였고,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고 종음(縱飮)하여 죽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崔珍玉〉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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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무과에 급제하였다.

    초기의 경력은 알 수 없으며, 1612년(광해군 4)에 삭주부사를 거쳐 회양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삭주부사 때 해유(解由:관원들이 전직할 때 재직중의 회계·물품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받던 일)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1615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광해군 말기에는 당시 재상이었던 박승종(朴承宗)과 인가(姻家)였던 까닭에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때에 참훈(參勳)·상가(賞加)문제로 사헌부 및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특히 전라좌수사 때에는 약초를 진상하여 가자(加資)를 얻은 일로 사신(史臣)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인조반정 때 주모자들이 거사 날짜까지 잡았으나 박승종과의 관계가 밀접한 그가 궁성의 호위를 맡고 있기 때문에 그를 얻은 뒤에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모자의 한사람인 장유(張維)가 흥립의 사위인 자신의 동생 신(紳)을 이용하여 이흥립도 내응하여줄 것을 허락받았으며 이에 반정군이 기병하였다.

    이때에도 미리 고변이 있어서 박승종에게 문초를 받았으나 박승종에게 어찌 공을 배반할 것이냐는 말로 반문하면서 위기를 모면하여 반정은 성공하였다.

    인조즉위 후 박승종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대의에 따라 거사에 가담하였으며, 그가 가담한 뒤에야 모두 의견이 정하여졌으므로, 공이 제일 크다고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의 훈을 받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하여졌으며, 수원부사의 직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수원부사 겸 경기방어사가 되었으나 이괄의 반란군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옥에서 자결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朝野會通. 〈李泰鎭〉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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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4(정조 1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문약(文若). 종억(宗億)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음직으로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848년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57년(철종 8) 강화부유수·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동지성균관사·경연관(經筵官)을 지냈다.

    1862년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새로운 인물이 중요한 관직에 기용될 때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4년(고종 1)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1865년 이조판서로 중용되었고, 이듬해에는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70세가 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참고문헌]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李相燦〉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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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7(순조 27)∼? 조선 말기의 무관.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중곡(中谷). 기석(基碩)의 아들이다.

    무과출신으로 1864년(고종 1)부터 1868년까지 선전관(宣傳官)·금위영천총(禁衛營千摠), 승정원의 동부승지·좌부승지, 좌·우승지, 그리고 태안부사를 역임하였다.

    1872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부사를 거쳐 1881년초 조선조사일본시찰단(朝鮮朝士日本視察團)에 군계선함사차정참획관(軍械船艦事差定參劃官)으로 참가, 총포·선박 등 주로 육군조련(陸軍操鍊)관계 분야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때 이동인(李東仁)은 참모관이었다.

    같은해 9월 도총부부총관에 발탁되었다가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전보되었고, 같은해 11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에 임명, 군무사분국절목(軍務司分局節目)의 결정에 따라 교련국구관(敎鍊局句管)이 되어 근대식 군부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1882년 4월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같은해 10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1885년 11월과 이듬해 4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승급된 뒤 6월 한성부판윤에 승진하였다.

    1887년 영국에 의한 거문도 강점사건이 일어나자 거문도경략사(巨文島經略使)로 임명되어 거문도사건의 처리를 위하여 활약하였다.

    1889년 대호군에 승급, 이듬해 재차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나자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가 되어 친군(親軍)의 장위(壯衛)·통위(統衛)양영병을 인솔하여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협력하여 전주를 수복하였다.

    그해 갑오경장으로 개화파 중심의 정부가 수립되자 좌포도대장에 기용되었다.

    저서로 《일본육군조전 日本陸軍操典》 4책이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東學亂記錄, 日東錄, 東京日記, 從政年表, 從官日記, 萬姓大同譜, 紳士遊覽團考(鄭玉子, 歷史學報 27, 1965)
    1881年朝鮮朝士日本視察團에 관한 一硏究(許東賢, 韓國史硏究 52, 1986). 〈李完宰〉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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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7(성종 18)∼1523(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응서(應瑞). 장단부사 이반(李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송희열(宋希烈)의 딸이다.

    진사로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형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사헌부장령·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현량과(賢良科)폐지 의견이 제시되자 그 불가함을 거론하면서 “이 과거가 비록 불공평하다고는 하지만 만약 파하면 그 사람들은 종신토록 금고를 당하는 것이니 어찌 쓸만한 사람까지 다 버릴 것인가!”라고 하여 적극 반대하고 사직을 요청하자, 이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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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5(세종 27)∼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맹언(孟彦).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대사간으로 특채되고, 1485년에 이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광양군(廣陽君)의 봉호를 받았다.

    1494년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陵)축조를 담당하였으며, 이어 한성부판윤·호조판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순변사로 여진족의 귀순처리와 회유책의 강구를 위하여 북방에 파견되었다.

    1497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 및 그 제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예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養老宴)에 참석, 어사주를 회배(回盃)할 때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른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무안에 부처되었다가 다시 온성·평해에 이배되었다.

    이듬해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하여 다시 거제에 이배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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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공서(公瑞).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이지직(李之直)의 손자이다.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조카이며, 의정부사인 이장손(李長孫)의 아들이다.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의 사촌이다.

    [활동사항]
    1472년(성종 3) 춘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85년(성종 16) 지평으로 있으면서 4품 이상의 당하관에게 역마(驛馬)를 이용하게 하는 것은 역로의 조폐(凋弊)를 가져오므로 불가함을 주장하였고, 그의 사촌인 이극균이 병조판서가 되자 혐의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황해도의 도사를 역임하였고, 다시 영안도도사에 제수되자 이를 회피하고, 1491년 보덕이 되었다. 연산군 재위 때에는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 병조참의를 거쳐 1496년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497년에는 군액과 번상의 폐단, 재가녀 소생의 허통 등을 주장하였다. 1498년에 무오사화가 발생하자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은 법률에 따라 논단해서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의 난정에 관직을 사퇴하고 해주의 수양산 아래에 은거하다 그곳에서 죽었다.

    [기타]
    창녕의 운곡서원에 제향(祭享)되어 있다. 묘소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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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중종 12)∼1568(선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숙희(叔喜). 영부(英符)의 아들이며, 명종 때 장령을 지낸 수경(首慶)의 동생이다.

     

    1546년(명종 1)생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48년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정언·부수찬을 역임하고, 1550년에는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고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2년 헌납에 승진되고 다음해 대사간을 거쳐, 1561년 예조참의·부제학이 되었다. 그뒤 1563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윤원형(尹元衡)의 소윤파가 득세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자, 이를 내심 두려워한 명종은 이량(李樑)으로 하여금 이를 대적하게 하려고 총애를 베풀어 이조판서 벼슬까지 주었으나 그는 많은 심복을 거느리고 흉악한 모의를 하다가 그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그의 죄를 탄핵하니 1563년 결국 이량은 강계로 귀양가고 간신들도 멀리 귀양갔다. 이때 그도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으나 1565년 풀려나와 부호군에 임명되었지만 그 이튿날 다시 양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명종 때에는 청백리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趙楨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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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선조 2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문언(文彦). 대제학 이첨(爾瞻)의 아들이고, 대사성 익엽(益燁)의 형이며, 이조참의 대엽(大燁)의 아우이다.

    문음으로 세자익위사세마가 되어 재직중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가 되었고, 이어서 정자·정언을 역임하였으며, 그해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15년 부교리가 된 뒤 헌납·성균관사서·지평·부수찬 등을 역임하고, 1617년 장악원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필선 겸 보덕·전한·동부승지에 이어 승지에 올랐다.

    대북파 집권하의 광해군 때 그의 아버지가 대북파의 영수로서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왕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기화로 등과한 뒤 5년 만에 빠르게 승진을 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아버지, 두 형제와 함께 주살(誅殺)당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文守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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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9(선조 22)∼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천미(天微). 영의정 준경(浚慶)의 증손이며, 예빈시정 사수(士修)의 아들이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고 1626년 승문원정자를 거쳐 저작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까지 호가하였고, 곧 박사가 되었다가 환도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여주로 돌아갔다.

    1628년 다시 박사를 제수받은 뒤 전적을 거쳐 감찰이 되었고, 이어 예조·병조·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32년 경성판윤(鏡城判尹)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호조·형조좌랑을 역임하고 다시 보성군수로 나가 곧 병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경상도사에 제수되었다.

    1635년 대동찰방(大同察訪)·형조정랑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이듬해 통례원상례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병으로 체직되어 여주에 우거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음을 듣고 호가를 위하여 곧 달려갔으나 중도에 청병(淸兵)을 만나 좌절되고 지평에서 의병을 모은 전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함께 춘천·양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이후 장령·예조정랑·군기시정·봉상시정 등과 네번에 걸친 사간의 임명, 두번에 걸친 홍문관응교의 제수, 승문원판교·사복시정·집의 등의 임명에 모두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여주에서 머물다가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만 일시 출사하였다가 곧 향리로 돌아갔다고 하고, 광해군 때의 폐모사건 이후 출사하지 않았던 영남의 김령(金#영03), 호남의 신천익(愼天翊)과 더불어 처음부터 사환(仕宦)에 뜻이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李文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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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선조 27)∼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대원(大遠). 광해군 때의 권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첨(爾瞻)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저작·부수찬·부교리·직제학을 거친 뒤 승지·대사성을 역임하였다.

    그의 형 원엽(元燁)·홍엽(弘葉)·대엽(大葉)과 함께 4형제 모두 문과에 등제하였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아버지 이첨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崔珍玉〉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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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2년(중종 37) ~ 1594년(선조 27). 자는 응초(應初). 훈련원 첨정(僉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이로 인해 통정대부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뒤에 증손자 이원정이 판서에 오르게 되어 재차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 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당시에 받은 공신녹권과 뒤에 호조참의에 추증되면서 받은 교지가 남아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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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1(세종 13)∼1494(성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위(景祁).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종묘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뒤 이조좌랑에 이르도록 항상 서연(書筵)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에 승진되었고, 1463년 성균관직강 겸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부호군(定略將軍副護軍)에 임명되고, 얼마 뒤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하여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경비의 식례(式例)인 《식례횡간 式例橫看》을 찬정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았고, 같은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1477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479년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가 되고,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넓혀 위판제도(位版制度)를 일신하였다.

    또, 향관(享官)의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의 북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고쳐 새롭게 하는 등 학궁(學宮)에 공이 컸고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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