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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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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9(성종 2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안(子安). 황해도관찰사 예손(禮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서(朴曙)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53년(단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65년 사헌부장령으로서 좌부승지 이영은(李永垠)과 함께 《경국대전》 이전(吏典)을 수교하였다. 그해에 종부시소윤, 1466년 의정부검상을 지내고, 1469년(예종 1) 사섬시부정으로서 삼포에 파견되어 왜사신접대사(倭使臣接待事)를 안핵(按覈)하였다.

    1470년(성종 1) 문학진흥을 위하여 재행(才行)이 겸비한 인물을 치부(置簿) 하였다가 겸예문관관(兼藝文館官)에 제수하는 겸예문관제의 실시와 함께 이에 선발되고, 1471년 1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에 의하여 “경명행수자(經明行修者)이니 사표직(師表職)에 제수하여야 한다.”고 하여 천거되었으며, 그해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면서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3월에는 강원도도사 최팔준(崔八俊)의 어육증여(魚肉贈與)와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그해 11월 성균관대사성으로 복직, 예문관부제학을 거쳐 1474년 8월 승정원좌부승지로 발탁되었다. 이어 우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77년 8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면서 재차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478년 대사헌으로 입조, 1479년 5월 이조참판, 8월 한성부우윤, 그해 윤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동지중추부사로서 하정부사(賀正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0년 5월 한성부좌윤, 곧이어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으며, 1481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재차 하정사 겸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2년 11월 공조참판에 개수되고, 성균관동지사를 계속하여 겸하였다.

    1485년 1월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면서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성균관생들로부터 “계속하여 학업을 지도하게 하여달라.”는 강청(强請)이 있었으나 “치민(治民)도 교회(敎誨)에 못지않다.”는 성종의 뜻에 따라 부임하였다가 그해 11월 동지중추부사에 체직하였다.

    근근봉공(勤謹奉公)하는 성품과 성리학에 정통한 재질로 성균관의 교육에 힘써,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사유자(師儒者)로 칭송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韓忠熙〉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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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5(세종 17)∼1503(연산군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주부(典農寺注簿)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468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대사헌·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147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7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494년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호조판서를 지내고, 그동안 평안·강원·전라·경상·영안(永安) 5도의 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고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지냈다.

    전례(典禮)에 밝고 사장(詞章)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성종 이후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와 항상 반목이 심하였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의 많은 학자를 제거하는 데 큰 구실을 한 원흉으로 일컬어진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 吊義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하여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성종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데리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먹은 일을 사초에 쓴 사실을 알고 가만히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을 충동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 등 사림파의 많은 학자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어세겸·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詮) 등과 함께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사화가 있은 뒤 잠시 파직을 당하였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라 하였으나, 뒤에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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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0(효종 1)∼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응(善應), 호는 농은(農隱). 충정공 준경(忠正公浚慶)의 5대손이며 후징(厚徵)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禹仁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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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6(인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옹(士雍). 덕형(德馨)의 증손이며, 상진(象震)의 아들이다.

    1692년(숙종 18)에 부평부사로서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등과하였다.

    학문이 깊고 문장에 능하여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그밖에도 사간원 헌납·사간, 사헌부집의 등으로 간관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임실현감·부평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정사에 힘썼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元裕漢〉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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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9(성종 20)∼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초(熹初), 호는 준암(樽巖). 현감 자(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光州安氏)로 사간 팽명(彭命)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1508년(중종 3) 왕이 성균관에 들러 시험할 때 수석으로 뽑혀 《예기》를 하사받았고, 1513년 수석으로 생원에 합격한 뒤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 공조정랑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19년 이조정랑으로 재직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형인 약수(若水)가 동료 유생 150여명을 이끌고 조광조의 신원을 호소하다가 옥에 갇히매 조광조와 약수의 사면을 주청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뒤 1537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한산군수로 있으면서 1539년 연산군과 노산군(魯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복성군(福成君)의 신원을 청하다가 잡혀 들어와 삭직당하였다. 그리하여 충주 북촌(北村)에 가서 살면서 스스로 호를 준암이라 하였다.

    그뒤 1543년 경기도의 재상어사(災傷御史)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수원부사·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지내다가, 1547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재직하던 중 소윤인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이 정언각(鄭彦殼)의 양재역(良才驛)의 벽서고발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일파를 모두 숙청할 때 대윤 윤임의 인척이라 하여 처형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그뒤 1570년(선조 3)에 신원되어 복직되었고, 몰수당하였던 가산을 돌려받았다. 대흥(大興)의 우천사(牛川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金成俊〉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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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9(선조 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출신.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집(集)의 후손으로, 희복(熙復)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고,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金龍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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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덕형(德馨)의 4대손이며, 집의 윤문(允文)의 아들이다.

    경종 때 음관(蔭官)으로서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역임한 바 있으나,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로는 관력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던듯하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때에는 도성내 주도층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하(李河)·이유익(李有翼) 등과 더불어 장사를 모집하여 대궐을 침범할 계획을 하기도 하였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세 차례에 걸친 국문을 받고 사형에 처하여졌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承政院日記, 戊申逆獄推案. 〈具琓會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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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권력이 옮겨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할아버지는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다.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사되었으며 그도 이에 연좌되어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李延慶)과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 일파에 밀려 파직당했다.

    이후 문밖 출입을 끊고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정진했다.

    1537년에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직제학·승정원승지·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0년 정적(政敵)이었던 이기(李芑)의 탄핵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복귀했다.

    1553년에 함경도순변사로서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을묘왜변 때는 전라도도순찰사로서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와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1558년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기간에 국정을 주도하여, 척신 윤원형(尹元衡)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하여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1572년(선조 5) 국가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遺疏)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朋黨)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현실화되었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東皐遺稿〉·〈조선풍속 朝鮮風俗〉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黨議通略, 朝鮮名人傳(申奭鎬外, 朝光社, 1939). 〈申解淳〉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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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號)는 암탄(巖灘).


    고려말(高麗末)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고 형 양중(養中)과 함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抗節臣)으로 조선조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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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조 참의(刑曹參議) 양중(養中)의 아들. 조선조에 사온서 주부를 역임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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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7(중종 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성(希聖). 고려의 문신인 집(集)의 5대손으로 증참판 남(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승원(李承元)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곤궁하였으나 뜻을 세우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홍문관정자에 선임되고 이듬해에 다시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왕의 사랑을 받아 박사·수찬·정언·지평 등을 지냈으며, 1544년 시독관(侍讀官)·교리를 거쳐 사복시정에 승진되어 이듬해에 《중종실록》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같은해 응교·사간 등을 역임하였고, 응교로 있을 때에 명종의 즉위와 함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아 지방관과 한직으로 밀려나 9년을 지냈다. 다시 등용되어 교리·직제학·승지·종부시정·이조참의·형조참의·한성부우윤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62년(명종 17)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1567년 첨지중추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68년(선조 1)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 편찬을 지휘하였다.

    그뒤 파직되었다가 1570년 서용되어 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다. 경연에 나아가 시강할 때에는 풍부한 학식과 청량한 음성으로 왕의 칭상(稱賞)을 받았으며, 옥사를 다스릴 때에는 판결이 분명하여 변동함이 없어 법정이 숙연하였다.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민폐를 덜고 생활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한다. 태종의 외예(外裔)라 하여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宋子大全. 〈金龍國〉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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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3(공민왕 12)∼1427(세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잠(仲潛).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한 집(集)의 아들이다.

    1382년(우왕 8)과거에 급제, 중서문하성의 녹사(錄事)를 거쳐, 1392년(태조 1) 기거주(起居注)로서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으로서 활약하여 1393년 정도전(鄭道傳)일파에 의하여 탄핵,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이방원이 즉위하여 정권을 잡자 사헌부장령으로서, 풍기단속과 공신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1407년(태종 7)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직제학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전토 40결을 하사받았다. 이어서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역임하였고, 창업 초기의 궁궐 수축에 힘썼으며, 외직으로 수원부사가 되어 민정을 직접 다스리기도 하였다.

    1411년 예조우참의로서 충청도·전라도 경차관에 임명되어 민정을 순찰, 전라도수군도절제사 홍유룡(洪有龍), 임실감무 최참(崔漸), 당진감무 임을생(任乙生)의 탐학을 밝히고 이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뒤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416년 한성부윤이 되어 도성의 살림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19년 세종이 즉위하자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평안도도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체계를 바로하는 데 힘썼다.

    1420년(세종 2)호조판서, 이어서 예조판서·대사헌·의정부참찬을 지내고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어 군권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나, 곧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하였으며, 특히 재정 부서에 오래 근무하였음에도 결코 축재에 관심이 없었다. 문장에 능하였고, 행정업무에 있어 결단력이 있었다. 후사가 없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李存熙〉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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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7(세종 9)∼1465(세조 1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여(德輿).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면 대의를 통하였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집현전에 발탁되었고, 1447년에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임명되었으며, 1448년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이 새로 설치되자 우찬독(右贊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즉위하자 경연사경(經筵司經)을 지내고, 이듬해 대제학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아 즉위하자 검상이 되었고, 즉위에 즈음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왕세자가 책봉되었을 때 보도(輔導)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1458년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460년 북정(北征)때에는 기무를 관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수찬하였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을 교정하여 간행하였고, 1461년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북정록 北征錄》을 찬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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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자화(子和), 호(號)는 음애(陰厓), 참판(參判) 극기(克基)의 아들.

    1480년(성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건릉 참봉(建陵參奉)을 거쳐 봉사(奉事)·직장(直長)·주부(主簿)를 지내고 공조(工曹)·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승진되었다. 이어 첨정(僉正)과 안성(安城)·고원 군수(高原郡守)를 역임하였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학파(新進學派)에 연좌(連座)되어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어 적소(謫所)에서 여생을 마쳤다.


    영광의 보촌서원(甫村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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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자정(子精), 호(號)는 석탄(石灘), 고려 말기에 벼슬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 후 은거하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에 임명되었으나 또 사양하므로 태종이 수차 방문하여 부임을 종용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죽은 뒤 광주(廣州)의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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