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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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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6(인조 24)∼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이조판서 원정(元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좌부승지 언영(彦英)의 딸이다.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어 봉상시봉사·승정원주서를 거쳐 홍주목사로 나갔다. 경신대출척으로 파직되어 아버지 원정의 유배지 초산에 따라갔다.

    1683년(숙종 9) 다시 복관되어 우승지·전라도관찰사·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진정(賑政)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도민들이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사비(永思碑)를 세웠다.

    외직에 있을 때에 견문한 사실과 군정(軍政)·호포(戶布)·시재(試才) 등의 시폐를 들어 시정책을 강구한 상소를 올렸으며, 충주의 관둔전(官屯田)을 공주에 넘기는 것을 극렬 반대하였다.

    〈서전차의 書傳箚疑〉·〈기뇌홍 記雷虹〉 등 많은 잡저를 남겼고, 저서로는 《정재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靜齋文集. 〈權虎基>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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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부(主簿) 우생(遇生)의 아들. 조선조에 평안도 절도부사(平安道節度副使)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增職),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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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여구(汝久). 삼도수군통제사 도빈(道彬)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를 지내고 1698년(숙종 24) 함경도병마절도사, 1701년 총융사를 거쳐 포도대장·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부사직이 되었으며, 이해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소론의 탄핵을 받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소론은 목호룡(睦虎龍)으로 하여금 노론의 4대신을 역모로 무고하게 하여 노론일파를 실각하게 하였으며, 그도 백망(白望)·이희지(李喜之) 등과 함께 투옥되어 장살되었다.

    1724년(영조 3)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辛壬紀年提要, 黨議通略. 〈崔珍玉〉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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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6(명종 11)∼1595(선조 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아버지는 판결사 시무(時茂)이며, 어머니는 종실(宗室)의원군 억(義原君億)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76년 사마시에 합격, 158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82년에 수찬으로 있을 때, 대제학 이이에게 추천되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시강하여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어사가 되어 호남에 내려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을 진구하였다.

    그뒤 형조참의·좌승지 등을 거쳐,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장령·집의·응교·직제학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의로 왕을 호종하였다. 왕의 행차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선조에게, 종묘와 사직의 위판(位版)이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고 아뢰니 선조가 크게 놀라면서 즉시 모셔오라 하였다.

    그는 급히 개성으로 달려가, 사람들이 모두 “이미 적장이 와 있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말렸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평양으로 모셔갔다.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1593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한때 관직을 떠났다.

    1595년에 한성부좌윤·황해도관찰사를 역임, 광림군(廣林君)에 봉하여졌고, 1596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계은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淸選考.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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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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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광양군(光陽君) 세좌(世佐)의 아들이다.

    1493(성종 24) 정조사(正朝使)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품계가 한 등급 오르고 이듬해 참봉·봉사를 역임하였다.

    1498(연산군 4) 오위부사직(五衛副司直)으로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이 되었으나 그 자격이 말썽이 되어 물러났으며, 1504년 아버지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장배(杖配)되고, 같은해 난신연좌례(亂臣緣坐例)로 처참효수(處斬梟首)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燃藜室記述, 己卯錄補遺. 〈權仁赫〉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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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4(현종 5)∼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례(元禮), 호는 예남(蘂南)·정졸재(貞拙齋). 도승지 시만(蓍晩)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6년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하여 정자·봉상시직장·평안도도사 등을 역임하고, 1700년에 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장령 등을 지내고 1704년에는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6년에 집의·사간·경연관 등을 거쳐 성천부사·순흥부사 등으로 나가 학정(學政)과 근검에 힘썼고, 1712년 다시 사간·남학교수(南學敎授) 등을 역임하고 1716년에 사직하였다.

    그뒤 1721년(경종 1) 다시 순천부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수찬·응교를 거쳐 의주부윤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간·경상도관찰사·호조참의·강릉부사에 이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판결사·공조참판 겸 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727년(영조 3) 예조참판·형조참판·대사헌 겸 비변사당상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다시 형조참판 겸 승문원좨주를 역임, 1743년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고, 한성부판윤·대사헌 겸 선공감제조·공조판서를 거쳐, 1747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계하여 서추(西樞)에 배속되었다.
    영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 《경전차의 經傳箚疑》·《송현제서증해 宋賢諸書證解》가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在澗集. 〈朴定子>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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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는 혜환재, 기(沂)의 아들, 가환(家煥)의 아버지.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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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3(선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빈(而賓), 호는 만회(晩晦). 영의정 준경(浚慶)의 증손이며, 시정(寺正) 사수(士修)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서·병조좌랑·수찬·지평·문학·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605년에 함경도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상의원정(尙衣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장령이 되고, 1610년에 한성부우윤이 되었다가 곧 대사간이 되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2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1618년에 한남군(漢南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우참찬·특진관(特進官)을 지내고 1627년(인조 5)에 다시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적을 피하여 달아났다.

    1641년에 경기도관찰사로 등용되고, 1644년에 예조참판으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 심양에 다녀왔다.

    이듬해 개성부유수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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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7(명종 12)∼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군수 호약(好約)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金馹起〉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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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중종 13)∼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 호는 과재(果齋). 병조판서 윤경(潤慶)의 아들이다.

    1539년(중종 34)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년)을사사화에 연루된 이휘(李輝)를 변호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 갑산에 유배되고, 1547년 사사되었다. 용모가 준수하고 태도가 의젓하여 조정에 있을 때 이황(李滉)에게 인정을 받았고, 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 등과 친교를 맺었다. 선조 때 신원되었다.

    편서로 《을사전문록 乙巳傳聞錄》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李貞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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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4(영조 20)∼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실학자·천주교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덕형(德馨)의 7대손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홍낙민(洪樂敏)과는 사돈간이 되며 교우가 두터웠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그뒤 현감까지 지내다가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이 되었고, 이어 검상·승지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부윤으로 나갔다.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청나라에 가는 기회에 천주교 교리와 직접 접하게 되었고, 귀국하여 이가환·이벽(李檗) 등과 함께 사귀었다. 이벽과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과 그 질서, 인간영혼과 후세상벌에 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서학의 교리를 토론하였는데, 결국 이 토론에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하였고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겉으로는 남인공서파(南人攻西派)와 친분을 가짐으로써 서학 반대자로서 자처하였다. 이후 병조참판·우승지·한성부우윤을 거쳐 1801년(순조 1)에는 대사간·예조참판·좌승지를 역임하였다.

    특히, 안정복(安鼎福)은 그가 천주학에 빠져 들어가자 장문의 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 총억(寵億)이 신자였던 관계로 반대파들은 그를 이른바 사학(邪學)의 교주라고 비난하였고, 그 자신도 친국소에서 무답으로 응하였기 때문에 단천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신원,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복암유고》가 있으며, 편서로는 《한음문고부록 漢陰文稿附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推案及鞫案, 順菴集, 闢衛編(李基慶)
    Histoire de L’eglise de Coree(Dallet, C. C., Paris, 1874). 〈金玉姬〉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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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2(광해군 14)∼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아버지는 도장(道長)이며, 어머니는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큰 학자였던 할아버지 윤우(潤雨)에게도 수학하였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교리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70년 청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으며,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경신대출척으로 초산에 유배가던 도중에 불려와 장살당하였다.

    9년 뒤인 1689년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원된 뒤에도 여러 차례 정국의 변화에 따라 추탈(追奪)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귀암문집》이 있으며, 편저에는 《경산지 京山志》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樊巖集. 〈朴錫武〉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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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1(명종 6)∼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여진(汝震). 준의(遵義)의 아들이다.

    1576년(선조 9)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선조의 사부(師傅)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부제학으로서 선조를 호종하면서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 제독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사후인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녹훈되었다. 뒤에 한천군(漢川君)으로 봉해졌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廣州邑誌. 〈兪炳勇〉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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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8(현종 9)∼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계수(季受). 덕형(德馨)의 5대손이며, 권유(權愈)의 문인이다.

    1690년(숙종 16)진사시에 합격하고, 1707년 경녕전참봉(敬寧殿參奉)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노론측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한때 파직되었다.

    1721년(경종 1)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에 등용되었고 외직으로 나아가 창평·익산·김포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뒤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전주판관이 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품계가 올랐으나 노론측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반대에 부딪혀 관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順菴集. 〈金海榮〉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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