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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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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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군미(君美). 정국3등공신인 찬성 손(蓀)의 아들이다.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靖國功臣)4등에 책봉되었고, 1509년(중종 4)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10년에는 지평에 임명되었다.

    1511년에 장령을 지낸 뒤 1512년에는 무재(武才)가 있다고 해서 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부임을 회피하였으므로 수원부사와 서로 바꾸었다.

    1517년에는 수원부사로 있으면서 이행(李荇)을 변론한 상서가 광패(狂悖)한 표현이 많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에 의하여 이루어진 대규모의 정국공신 삭훈시에 그도 삭훈되었다가 기묘사화 후 복적되었다.

    1522년에는 당시에 통훈대부 검상이었으나, 무재를 지닌 문신으로 여겨져 당상관으로 가자된 뒤 만포첨사에 임명되었다.
    1525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528년에는 다시 무재가 있다는 이유로 가자되면서 함경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그뒤 황주목사를 지내고 1531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32년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33년에는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1534년에 진위진향사(陳慰進香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任先彬〉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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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1(현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효백(孝伯). 만경(晩卿)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에 생원이 되고, 170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22년(경종 2) 부수찬을 역임하고 수찬에 올랐다.

    이듬해 진위 겸 진향사(進慰兼進香使)여성군 집(礪城君楫)과 함께 그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는 필선이 되었다. 이어서 헌납·집의·수찬·보덕·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 때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간언으로써 이를 막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그뒤 다시 복직되어 형조참의·승지·동지의금부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文守弘〉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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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5(선조 8)∼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이(靜而).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광록(匡祿)이며, 어머니는 권적(權適)의 딸이다. 큰아버지 광국(匡國)에게 입양되었다.

    1603년(선조 36)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선전관(宣傳官)으로 등용되고, 1611년(광해군 3)에 훈련원습독관(訓鍊院習讀官)이 되었다.

    1616년에 해주판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듬해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곡산군수로 이배(移拜)되었다.

    1618년에 가산군수로 선치를 하였고, 그뒤 창주첨사(昌州僉使)를 거쳐 강계부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의 별장(別將)이 되어 안주(安州)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우찬성(右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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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7(성종 8)∼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간중(幹仲).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며, 어머니는 강원도관찰사 조근(趙瑾)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24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장원이 되었고, 이어 그해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그뒤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수찬을 역임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아버지가 성종 때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간 형방승지였던 것이 화근이 되어 아버지를 비롯, 형들과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당시 형제들이 모두 명망이 높았는데 이때 일시에 처형을 당하니 세상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禹仁秀〉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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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수(字綏). 부사 효훈(孝訓)의 아들로,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


    15세 때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이 심복을 시켜 자기를 거짓으로 논척하도록 꾸미고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그들의 논척이 부당하다는 소를 올리게 하여 자기의 지위를 굳히려 하는 일이 있자, 이를 알고 당시 남학장의(南學掌議)로서 이이첨의 간사한 꾀를 폭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이첨에 의하여 중형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그뒤 1633년(인조 11)사마시에 합격하고, 대신들에 의하여 지난날의 지조가 인정되어 왕에게 알려지게 되자 사옹원봉사에 특별히 임용되었다. 벼슬은 군수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車勇杰〉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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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79(성종 10)∼1523(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거(仲擧), 호는 송헌(松軒). 파주목사 순언(純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일찍이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많은 고전을 섭렵하였다. 지기(志氣)가 높고 절조가 있어 추앙을 받았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사(蔭仕)로 입사하여 사축서사축(司畜署司畜)과 음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관직을 버리고 전원에 돌아와서 소나무 수천 그루를 뒷산에 심고 가꾸었으며,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

    1520년 김안국(金安國)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천(利川)에 우거하고 있을 때 10리 거리를 두고 서로 내왕하면서 시와 풍류를 즐겼다. 김안국이 몇 번이나 다시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은사(隱士)로서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權五虎〉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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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5(숙종 11) ∼ 1761(영조 37) 자는 초백(楚白), 호는 서헌(恕軒), 병조 좌랑(兵曹佐郞) 기명(基命)의 아들.

    1720년(숙종 4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남인(南人)에 속했으므로 벼슬길에 전망이 보이지 않아 대과(大科) 응시를 포기했다. 학문은 특히 예학(禮學)이 뛰어났다.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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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6(영조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상욱(尙煜)의 손자로, 기숭(基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주(金霔)의 딸이다. 충주에서 살았다.

    1813년(순조 13)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19년 승문원박사에 제수되었다.

    그뒤 1822년 홍문관의 교리·수찬을 임명하기 위하여 만든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1826년 권점(圈點)4점으로 도당록(都堂錄)에 등록되었다.

    1829년 세자시강원문학을 제수받고 예식절차를 맡는 임시벼슬인 예모관(禮貌官)에 임명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자(陞資)되었다.

    1831년 홍주목사로 재임중 이양선(異樣船)한척이 홍주의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하자,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영국이 배로 무역의 길을 트기 위해 온 것을 알아내어 정부에 보고하는 민첩함을 보였다.

    그뒤 1835년(헌종 1)대사간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李載琥〉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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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3(현종 4)∼1723(경종 3).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광주(廣州).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지하(祉遐)의 아들이다.

    1697년(숙종 23)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의 나이 35세 때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이 되었다.

    그뒤 전적, 예조와 병조의 좌랑과 정랑, 서산현감, 전라도와 강원도의 도사, 울진현감·정언·헌납·지평·장령·장악원정을 역임하고, 1716년(숙종 42)에 강계부사가 되었다.

    그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와 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성주목사로 발령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재직중 죽었다.

    그는 지극한 효자로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지극한 정성으로 시묘를 하면서 애통해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또다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고, 스스로의 몸과 어머니의 병을 대신하여줄 것을 신에게 빌었다. 여러 번 손가락을 자른 것이 병이 되어 죽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陶谷集. 〈李在範〉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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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지윤(志尹), 호는 사병(四屛). 공조참의 홍(洪)의 아들이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556년(명종 11)의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곧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561년 강원도도사가 된 이래 오랫동안 외직을 역임하였다.

    1566년 풍덕군수로서 이 군의 민폐를 열거하면서 국가행정전반에 걸친 개혁을 요구하는 장문의 소를 올렸다.

    1576년(선조 9)일시 사성이 되었으나 곧 외직에 나갔고, 임진왜란중에는 안주·양주의 목사를 역임하다가 1598년 호조참의가 되어 전라도에 파견되어 군량미조달에 공을 세웠다.

    기묘사림파 약빙(若氷)의 손자인 관계로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직으로만 돌아 중용되지 못하였으나 지방 통치에서 민심을 얻어 명성이 높았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己卯錄, 燃藜室記述. 〈朱雄英〉

    작성자[홈:귀암]_광호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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