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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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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증(李克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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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6:39 조회 1,93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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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세종 13)∼1494(성종 2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위(景祁).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종묘녹사(宗廟錄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기시직장이 되고, 우정자를 역임하였다.

그뒤 이조좌랑에 이르도록 항상 서연(書筵)을 겸하였다.

1461년 정랑에 승진되었고, 1463년 성균관직강 겸 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을 역임하였다.

1467년 정략장군부호군(定略將軍副護軍)에 임명되고, 얼마 뒤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하여졌고, 1469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국가경비의 식례(式例)인 《식례횡간 式例橫看》을 찬정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를 받았고, 같은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계되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1477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479년 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가 되고,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1481년 좌참찬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84년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로서 문묘를 수축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넓혀 위판제도(位版制度)를 일신하였다.

또, 향관(享官)의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의 북에 두었고, 관사의 무너진 곳을 고쳐 새롭게 하는 등 학궁(學宮)에 공이 컸고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관직에 있을 때는 부지런하고 성실히 공사를 처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李範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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