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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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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돈(李克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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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6:42 조회 1,90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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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세종 17)∼1503(연산군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고(士高).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주부(典農寺注簿)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468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예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대사헌·형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147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6년 예조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7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494년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호조판서를 지내고, 그동안 평안·강원·전라·경상·영안(永安) 5도의 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고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지냈다.

전례(典禮)에 밝고 사장(詞章)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성종 이후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와 항상 반목이 심하였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의 많은 학자를 제거하는 데 큰 구실을 한 원흉으로 일컬어진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당상관으로서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 吊義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하여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성종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데리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먹은 일을 사초에 쓴 사실을 알고 가만히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 결국,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을 충동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 등 사림파의 많은 학자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어세겸·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詮) 등과 함께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사화가 있은 뒤 잠시 파직을 당하였다가, 다시 광원군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라 하였으나, 뒤에 다시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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