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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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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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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1 23:24 조회 3,54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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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문학에 통달했다. 특히 이항복(李恒福)과는 죽마고우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이(李珥)가 호당(湖堂)을 뽑을 때 이항복과 함께 뽑혀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다음해 서총대(瑞蔥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다이라[平義智] 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591년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피난했는데,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이르자 단독으로 일본의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했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파병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명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대사헌으로서 이들을 맞아들였으며, 이어 한성판윤에 올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했다. 1595년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御史)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했다.

이해에 우의정에 오른 뒤 다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이항복의 진언으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힘썼고, 다음해 영의정이 되었다.

1606년 영중추부사의 한직으로 밀려났으나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명나라가 왕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박응서(朴應犀)의 상변(上變)으로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과 함께 이에 적극 반대했다.

그뒤 광해군이 그의 주청에 따라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자 삼사가 모두 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했다. 그뒤 용진(龍津)으로 돌아가 병으로 죽자 광해군이 애도하여 복관을 명했다.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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