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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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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균(李克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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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6:46 조회 2,29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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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방형(邦衡). 우의정 인손(仁孫)의 아들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무술에도 뛰어남으로써 세조의 총애를 받고 선전관이 되었다.

1459년 성균관주부를 거치고, 이어 회령도사·지평, 도체찰사의 종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김구(金龜)·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교정손자주해 校正孫子註解》를 찬하였다.

1467년 부호군으로 만포절제사(滿浦節制使)가 되었고, 건주위 정벌의 군공으로 3등 공신이 되어 노비 6구(口)를 하사받았다.

1469년(예종 1)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472년(성종 3)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147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7년 영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47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481년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평안도절도사·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84년 대사헌을 거쳐 1486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의금부당상·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98년 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경변사(警邊使)로 나아가고 150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좌의정 성준(成俊)과 함께 《서북제번기 西北諸蕃記》와 《서북지도 西北地圖》를 편찬하였다.

1502년 영의정 및 좌의정과 함께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왕에게 상소하였으며, 1503년 좌의정이 되었다. 여러 차례 연산군의 황음(荒淫)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갑자사화 때 조카 세좌(世佐)와 함께 연루되어 인동(仁同)으로 귀양가서 사사되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李範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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