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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李潤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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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7:00 조회 1,55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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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연산군 4)∼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길(重吉), 호는 숭덕재(崇德齋). 세좌(世佐)의 손자로, 수찬 수정(守貞)의 아들이며, 준경(浚慶)의 형이다.

1504년 갑자사화에 아버지 수정이 화를 입자 연루되어 전가족이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유배중에 어머니로부터 《효경》·《대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략이 많고 학문이 깊어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3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서 홍문관으로 옮겨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역임하고, 사간원·사헌부로 옮겨 정언·사간·지평을 지냈다.

1543년 의주부윤이 되어 국방을 강화하였고, 인종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내직으로 옮겨 대사간이 되어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대윤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3등에 책록되고 광산군(廣山君)에 봉하여졌으며,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품성이 거칠고 위험함을 논박하다가 쫓겨나서 성주목사가 되어 고을을 잘 다스리니, 성주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하여 〈운간이사군 雲間李使君〉이라는 노래로 치하하였다.

이때 아들 중열(中悅)이 이덕응사건(李德應事件)에 몰려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1550년(명종 5) 공훈과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553년 용서되어 다시 승지를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주부윤으로서 영암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그 공으로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그뒤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를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노략질하자 국왕이 “평안도가 더욱 중하니, 반드시 최적임자를 선택하여야겠다.”고 하여 수망(首望)으로 천거되었다. 오래 앓던 끝이라 몸이 허약하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평안하기를 바라겠는가!” 하고 평안도관찰사에 부임하여 국방을 강화하다가 마침내 공관(公館)에서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海東名臣錄. 〈崔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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