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현(李英賢) > 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acccbf1ee4bce4b3163fff0a141dadb8_1571742161_4737.jpg
 

acccbf1ee4bce4b3163fff0a141dadb8_1571742161_4737.jpg
 

이영현(李英賢)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7:10 조회 1,718회 댓글 0건

본문

1507(중종 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성(希聖). 고려의 문신인 집(集)의 5대손으로 증참판 남(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승원(李承元)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곤궁하였으나 뜻을 세우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홍문관정자에 선임되고 이듬해에 다시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왕의 사랑을 받아 박사·수찬·정언·지평 등을 지냈으며, 1544년 시독관(侍讀官)·교리를 거쳐 사복시정에 승진되어 이듬해에 《중종실록》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같은해 응교·사간 등을 역임하였고, 응교로 있을 때에 명종의 즉위와 함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아 지방관과 한직으로 밀려나 9년을 지냈다. 다시 등용되어 교리·직제학·승지·종부시정·이조참의·형조참의·한성부우윤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62년(명종 17)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1567년 첨지중추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68년(선조 1)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 편찬을 지휘하였다.

그뒤 파직되었다가 1570년 서용되어 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다. 경연에 나아가 시강할 때에는 풍부한 학식과 청량한 음성으로 왕의 칭상(稱賞)을 받았으며, 옥사를 다스릴 때에는 판결이 분명하여 변동함이 없어 법정이 숙연하였다.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민폐를 덜고 생활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한다. 태종의 외예(外裔)라 하여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宋子大全. 〈金龍國〉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광주이씨 석전종중

  • 010-2068-2831
  •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암
  • 제작/관리이광호
  • 로그인하셔야합니다.질문과답변, 자유게시판등
  • 질문과답변
Copyright © 2019 광주이씨 석전종중.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