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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 역사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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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李爾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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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7:16 조회 2,04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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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명종 1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 좌찬성 극돈(克墩)의 후손이며, 우선(友善)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3년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으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 거상(居喪)을 극진히 함으로써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승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1608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이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소북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鄭仁弘)과 짜고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을 논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해 2월에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일약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권세를 장악한 그는 정인홍과 함께 자기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 진(臨海君珒)과 유영경을 사사하게 하는 등 소북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 태경(晋陵君泰慶) 등을 죽이고, 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 그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하게 하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하게 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이듬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당하였다. 아들 원엽(元燁)·홍엽(弘燁)·대엽(大燁)삼형제도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朝野輯要. 〈趙啓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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