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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행(李必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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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홈:귀암]_광호 작성일 07-12-06 09:07 조회 1,94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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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선조 22)∼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천미(天微). 영의정 준경(浚慶)의 증손이며, 예빈시정 사수(士修)의 아들이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고 1626년 승문원정자를 거쳐 저작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까지 호가하였고, 곧 박사가 되었다가 환도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여주로 돌아갔다.

1628년 다시 박사를 제수받은 뒤 전적을 거쳐 감찰이 되었고, 이어 예조·병조·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32년 경성판윤(鏡城判尹)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호조·형조좌랑을 역임하고 다시 보성군수로 나가 곧 병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경상도사에 제수되었다.

1635년 대동찰방(大同察訪)·형조정랑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이듬해 통례원상례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병으로 체직되어 여주에 우거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음을 듣고 호가를 위하여 곧 달려갔으나 중도에 청병(淸兵)을 만나 좌절되고 지평에서 의병을 모은 전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함께 춘천·양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이후 장령·예조정랑·군기시정·봉상시정 등과 네번에 걸친 사간의 임명, 두번에 걸친 홍문관응교의 제수, 승문원판교·사복시정·집의 등의 임명에 모두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여주에서 머물다가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만 일시 출사하였다가 곧 향리로 돌아갔다고 하고, 광해군 때의 폐모사건 이후 출사하지 않았던 영남의 김령(金#영03), 호남의 신천익(愼天翊)과 더불어 처음부터 사환(仕宦)에 뜻이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李文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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