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역사 / 청백리공 / 묘소와 사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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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공 : 청백리공 묘갈명 청백리공 묘소와 사인공




淸白吏公의 墓所와 舍人公의 早卒



參議公(淸白吏公)이 돌아 가시여 산소자리를 고를 때에 進士 曹漢弼이 擇地하니 曹漢弼은 當代에 제일가는 風水가였다. 그가 城南市 下大院洞 現 淸白吏公의 山所자리를 잡아놓고 말하기를 (여기가 極히 좋은 자리로 子孫들이 代代로 끊이지 않고 大科及第하여 顯官이 背出될 곳이나 한 가지 험은 長子가 凶한 일을 當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長孫 仁孫 禮孫 三兄弟는 卽時 무릎을 맞대고 良策을 熟議하였다.


두 아우(仁孫 禮孫 )들은 長兄께서 不吉한 자리에다 아무리 좋다 한들 아버지를 모실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舍人公(長孫)께서는 (吉地를 擇하여 아버지를 편히 모시는 게 나의 所願일 뿐 나에게 吉하고 不吉함은 말할 것이 없다)고 단호하게 그 자리에 모실 것을 主張했다.


그렇게 하여 只今의 자리에다 親葬을 모셨는데 果然 그 이듬해에 舍人公께서 侍墓中 三一歲로 夭折하였을 뿐만 아니라 子孫들도 長子집 보다 支孫들이 繁盛하니 果然 曹公의 보는 바대로 였다고 後人들은 말하고 있다.




淸白吏의 行蹟과 配位慶州李氏의 婦德



寶文閣直提學 刑曹右 議公의 諱는 之直이요 字는 伯平으로 學問이 高明하고 모든 일이 嚴正하여서 바른 道理로 王子들과 交友터니 芳遠이 그의 아우 芳碩과 芳蕃을 죽이려하여 軍士를 일으켜 나가거늘 公이 말머리를 잡고 말하되 「하늘에 日月이 中天한데 父王앞에서 아우를 죽이는 骨肉相爭이 웬말인가」고 極諫했다. 左右의 軍士들이 칼을 뽑아 죽이려 하거늘 芳遠이 急히 손을 들어 말리기를 「李公은 나의 옛날 親舊로 마음을 서로 아는지 이미 오래다.

그가 어찌 芳碩의 付託을 받고 하는 말이겠느냐」고 했다.


옆에 있던 卞 春亭이 또한 諫하기를 「李公의 忠誠之心은 위로는 日月과 빛을 다투고 아래로는 伯夷叔齊와 더불어 志操를 견줄 분으로 千載에 오직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한 臣下라」고 함으로 해서 죽음을 免 하고 譴責만을 받고 廣州 漢陰村 炭川가에 물러나와 寓居했다.


太宗이 臨宗할 때 東宮(世宗大王)을 불러 이르기를 「李之直은 忠誠스럽고 正直하여 옛날 朱雲과 같은 사람이니 버리지 말고 네가 불러서 重히 쓰라」고 하였다. 世宗大王이 卽位 하면서 곧바로 刑曹右參議에 徵召하는 傳旨를 내렸으나 赴任치 못하고 卒하였다.


配位는 慶州李氏니 知仁州府使 元普의 따님이다. 性品이 嚴正하고 집안을 다스림에 法度가 있어 婦德을 고루 갖추었다. 忠僖公이 높은 벼슬을 할 때였다. 어느 날인가 鄕里인 廣州의 衙前이 忠僖公께 問安을 드리러 왔더니 公께서 뜰아래 앉게 했다.


이를 본 어머니 되시는 李氏 夫人께서는 忠僖公을 꾸짖어 말하기를 「衙前의 身分이 비록 賤하나 너의 祖父(生員公 唐을 일컬음)와 같은 同級 이거늘 너는 어찌 옛날의 根本을 생각지 못하고 賤하게만 보느냐」고 하였다.


忠僖公이 謝罪하고 물러나와 그 뒤로는 廣州衙前이 오면 반듯이 자리를 같이하여 對話 하기를 至極이 된 후에도 계속 하였다 하니 가히 夫人의 婦德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으며 廣李의 繁榮도 이러한 蔭德임을 새삼 想起토록 하는 바다.



== 대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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