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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종택 소개와 칠곡 석전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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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 문과 집안 석전의 이씨家


* 병자호란 때 임금을 모신 이도장

* 불굴의 정치인 이원정
* 선정을 배푼 이담명
* 3대 문집의 제작



칠곡 석전의 이씨가에서는 인조대에 이도장이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랐다. 이후 학문적 전통이 지속되어 아들 이원정, 손자 이담명까지 3대가 문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로 인해 석전(일명 : 돌밭)의 광주이씨 가문은 3대 문과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광주이씨는 15C말경 한 일파가 경상도 칠곡으로 이주하여 영남사람이 되었다. 당시 둔촌 이집의 증손자이자 이극배등 8극중의 한 사람인 이극견이 성주목사로 재임하였는데, 이때에 인근의 유력사족인 영천 최씨 최하(崔河)의 무남독녀를 며느리로 맞이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 아들 지(摯, ?~1535)가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경상도로 내려온 이후에는 지의 고손인 이윤우(李潤雨, 1569~1634)때부터 가문이 성장하였다. 이윤우는 정치적으로 공조참의에 이르고, 학문적으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고제로써 조야의 신망을 얻었다.


그는 도창(道昌), 도장(道長), 도장(道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중 둘째 도장은 자손이 없던 윤우의 4촌동생인 영우의 양자가 되면서 분파하였다. 아울러 본래의 터전인 상지(上枝, 일명: 웃갓)에서 석전(石田)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계파를 열었다.


이도장(李道長 : 1603~1644)은 1630년 문과에 올라 승정원주서, 예문관 검열, 봉교, 사헌부지평, 이조좌랑, 홍문관수찬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승정원주서로 재직할때에 병조호란이 발발하였다. 이 때에 그는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다음, 수성을 주장하여 위기를 극복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원정(李元禎, 1622~1680)은 아들 이담명과 함께 현종, 숙종대 남인 공론을 주도하는 위치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1652년 문과에 합격하여 두루 관직생활을 하다가 숙종 전반에 이조판사에 올랐다. 이후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대거 물러날때 서인들의 과도한 정치적 공세로 희생되는데, 이때 형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다가 애석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담명(李聃命, 1646~1701)은 1670년 문과에 오르고, 승정원주서를 거쳐 홍주목사에 이르렀다가 경신환국으로 다시 물러났다.

이후 10년만인 숙종15년(1689) 기사환국때에 다시 등용되어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푼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숙종20년(1694) 갑술환국 이후로는 다시 정계를 떠나야만 했다.


숙종대 이후 영남의 광주이씨 가문들은 당시 대부분의 영남사림들이 그랬던것처럼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지역사회 내에서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잘 유지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대총재 이원정과 소재(小宰) 이담명

* 정치적 활약, 그리고 역경
* 역사기록의 시작, 승정원사초


칠곡 석전[돌밭]의 광주이씨는 현종·숙종대의 이원정과 그의 아들 이담명으로 대표한다.


이원정은 문과를 거쳐 숙종대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담명은 역시 문과에 합격한 다음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이조판서는 육조의 선임기관인 이조의 장관이라는 점에서 총재, 혹은 대총재라 부르기도 하였고, 해당 부서의 참판은 그 다음의 직위여서 소재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원정과 이담명이 활약하던 현종·숙종대의 정국은 대개 서인이 정권을 주도하면서 일부 남인이 가담하는 형국이었다. 서인들은 인조대에 정권을 잡은 이후 이 시기까지 정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현종대에는 서인과 남인세력이 국왕을 중심으로 대립하였던 기해예송, 갑인예송등의 예론정국이 이어졌으며, 뒤이은 숙종대에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이어지며, 정권이 반복 교체되었다.


현종·숙종대는 영남의 남인들이 기호의 남인들과 협력하면서 중앙의 서인·노론계와 대치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또한 숙종초기의 남인들은 허목(許穆)을 대표로 하는 청남(淸南)과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으로 구분되어 자가도 하였는데, 당시 이원정등은 정치적인 행보상으로 볼때는 특별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는 않았다. 다만, 심정적으로는 허목과 윤휴가 있는 청남에 다소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대에는 환국으로 인한 정치적 세력변화가 심하였다.


이전에 현종 15년 갑인예송으로 인하여 남인들이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러한 정국은 숙종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숙종6년 경신환국으로 인하여 남인정권이 물러나게 되었으며, 당시 이조판서이던 이원정은 귀양을 가게 되었고, 얼마후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숙종15년에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서 서인정권이 붕괴되고 다시 남인들이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때 이담명은 다시 중앙에 진출하여 도승지, 예조참판, 경상도관찰사.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에 이르면서 남인들의 공론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숙종20년에 일어난 갑술환국으로 그는 다시 정계에서 물러나야만 하였다.


이후 칠곡의 광주이씨뿐만 아니라 영남의 남인들은 정계에 진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광주이씨들은 대개 정치를 멀리하고 학문적 소양을 쌓아가면서, 사회경제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지방의 유력사족으로 존재하였다.
 



광주이씨 석전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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