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역사 / 둔촌할아버지 / 묘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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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역사 / 둔촌할아버지 / 묘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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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할아버지 : 둔촌유사 묘갈문 정훈,유묵,효자우물
신도비명

사우연원록



둔촌 묘갈문(墓碣文)


우리 이씨는 광주를 본적으로 하고 있는데 둔촌선생이 시조이시다.


선생께서는 고려말에 나시어 도학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겼고 문장과 지절은 일세에 으뜸이었으니 모든 전기를 상고해 보면 낱낱이 알 수 있다.


일찌기 안 문경공에게 수업하셨는데 그 선생에게 도를 안다고 촉망하니 도은은 (사람을 알아보는 명감이 있다)고 안공을 칭송하였으며 목은은 문경공의 묘지에서 그 문인들을 열거하면서 맨 먼저 선생을 (능히 황야에 숨을 수 있었다)고 허여 하였는데 그때에 황실은 기울어져 가고 변고는 끝이 없었으나 선생은 충과 효가 두루 지극하여 의로움이 얼굴빛에 나타났고 마음을 진작하고 성질을 참으면서 정과 리를 완곡하게 다하여 그 뜻은 금석이라도 뚫을 만하고 기개는 창궁에라도 닿을 만 하였으니 이 뒤로 수백 년을 지난다 해도 참으로 그 성덕은 형용키 어려운 바가 있겠으나 생각해보면 그분들의 글자 한 자 말 한 마디가 어찌 형적의 대충스러움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물며 일대의 명류들이 경복치 않은 이 없었으나 포은 선생같은 분은 동방의 백세사가 도학으로 그의 추중을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우리 선생에게만은 (맹씨의 가르침을 조심스레 받들어 조장도 말고 잊지도 말게나.

천추에 이 마음이 같나니, 연어는 아득히 양양하구나)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함양한 공정과 처궁하던 역량을 더욱 징험할 수 있겠다.


선생의 아버지가 휘 당은 본래 고을의 아전으로서 사마시에 합격하셨고 현행이 있으셨다.


아들 다섯이 모두 등과했는데 선생은 둘째이시다. 선생의 초명은 원령이시니 원의 태정 정묘년에 나시어 지정 七년 고려 충목왕 삼년 丁亥에 등제하여 봉순대부 판전교시사를 지내셨고 명의 홍무 二十년 정묘년에 졸하시니 향년 六一이다.


공민왕 무신년에 역적 신 돈을 거슬러 화가 곧 닥치게 되자 아버지를 업고 난을 피하여 새재를 넘어 남으로 내려가 영천의 동년인 최 원도의 집에서 숨어 지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고을의 남쪽 나현에 장례를 모셨다.


돈이 주륙을 당하자 비로서 돌아오셔서 이름은 집, 자는 호연이라 고치고 둔촌이라 호 하셨는데 그 뜻은 목은이 지은 자설과 둔촌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六 년째인 임신년에 이조에서 혁명하니 자손들은 경도 되고 상도 되어 앞뒤로 줄을 이으니 선생에게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선생의 세 아드님은 모두 등제했는데 맏이가 지직으로 직도와 청절이 있으셨고 벼슬은 형조 참의, 보문각 직제학이며, 다음 지강은 좌참찬에 시호는 문숙이요, 끝의 지유는 목사이시다. 참의공의 세 아드님도 모두 등제했는데 장손은 사인이요, 인손은 우의정으로 세조를 도와 상업을 이룬바 있었고, 시호는 충희이며, 예손은 관찰사를 지내셨다.


사인공은 아들 한 분을 두셨는데 극규로 문과하여 병조 참의요, 청명과 직절로 세상을 울렸다.충희공의 다섯 아드님도 모두 등제했는데 극배는 영의정으로 광릉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이며, 극감은 형조 판서로 광성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경이요, 극증은 판중추로 광천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공장이며, 극돈은 좌찬성으로 광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이요, 극균은 좌의정으로 광남군에 봉해지셨다.


세상에서 광이에 오자과가 두 번이라 알려지고 있는데 선생의 형제분과 이분들을 지칭한 말이다.


극기는 에손의 아드님인데 삼조참판과 예문관제학으로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그 뒤로도 대대로 법도를 지켜 대마다 드러난 자손들이 있었으니 윤경은 병조 판서로 덕량이 있었으며 시호는 정헌인데 이름과 호는 명나라 사책에도 나와 있고, 준경은 영의정으로 국조의 현상으로 꼽히며 선조묘정에 배향됐는데 시호는 충정이며, 연경은 교리인데 성리학에 정통하여 학자들이 탄수선생이라 부르고 있고, 유경은 남대 지평이요, 약빙은 이조 정랑인데 모두 극감의 증손이 된다.


영부는 장령이요, 영현은 참판으로 예손에게는 증손이 되는데 연경, 약빙, 영부는 나란히 기묘명 현에 들어있다.


세전은 부사로 증 예조참판이요, 세정은 이조 참의 도승지, 관찰사인데 극돈의 아드님이시다.


덕형은 여의정으로 목묘를 도와 중흥 명상이 됐고 시호는 문익인데 극균에게 五대손이 된다. 광길은 상의정인데 극배의 현손이요, 상안은 부사로 정묘란에 충절을 세웠고 시호는 충민이니 극돈의 五대손이다.


근세에 있어서는 필형은 홍문교리요, 필영은 좌참찬이며, 필행은 홍문응교이니 모두 준경에게 증손이 되고, 여황은 관찰사인데 덕형에게 아들이 되며, 윤우(참의) 예손의 七대손이요, 도장은 응교로 윤우의 아들이다.


선생의 뒤로 연대도 오래 됐지만 화주 숭벌로 대동에서는 우리가 첫째로 꼽히는데 그동안 과거에 급제하여 현사에 나가고 재열에 오른 사람은 뒤를 이어 이 숫자에 그치지 않지만 우선 크게 드러난 사람은 위와 같이 드는 바이다.


선생의 묘소는 광주의 치서 음촌 유향원에 있으며, 부인은 정화택주 영주 황씨이시다.


옛날에 단갈이 있었으나 해가 오래되어 깎이고 부스러지니 자손들 중에 첨지 형윤, 전 현감 정망, 현령 필성, 도사 지하, 부사과 도빈, 예조 정랑 휴징, 봉사 상정, 진사 신징, 유학 두익, 갑과 급제 원정, 진사 의징, 생원 후징, 승문 정자 상진, 생원 건징등 백육십여 인과 외손에서 능주부원군 구 인후, 이조 판서 정 세규, 사헌부 집의 송 준길, 세자 시강원 진선 송 시열, 홍문 교리 윤 집, 사헌부 장령 조 속등 백육십여 인이 선생의 사적이 인멸하여 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뜻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새로 큰 비를 세우게 됐는데 불초손인 나에게 전말을 대충 적으라고 말곁으나 나는 지식도 모자라고 문견도 적으니 어떻게 옛 사람의 조덕 기술함을 당할 수 있으랴.


오호라! 선생의 도덕은 축적된 뒤에 발현하였고, 출처의 대절은 작작한 여유가 있었으며, 풍성의 수립한 바는 갈수록 더욱 드러났는데 그 천리와 조예에 있어서는 포, 목, 도 제현들이 반복하여 상세히 말했으니 더 할 말이 없겠고, 거취나 행장에 대해서는 고려서에서 신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며, 보계나 지망은 여지승람에서 사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오.


문장과 제영은 권축이 있기 마련이니 선생의 일은 밝기가 해와 별 같아서 백세 뒤에나 보자는 그런 게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그 뿌리가 깊고 근원이 멀면 가지가 무성하고 흐름은 긴 법이니 우리가 줄곧 창대하고 계속하여 침체치 않는 것은 우리 조상이 일만 자손을 감싸 침체치 못하게 하시는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지 말고, 너의 덕을 닦을 지어다)하였으니 불초등이 생적(비석)을 세움에 있어서 어찌 느끼는 바가 없을 수 있겠는가!


11대손 통훈대부 행 예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휴징은 삼가 짓고, 승문원 정자 상진은 삼가 쓰다. 숭정 기원 三五년 임진(효종三년)상한데 세우다.



== 대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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