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역사 / 둔촌할아버지 /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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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역사 / 둔촌할아버지 /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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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할아버지 : 둔촌유사 묘갈문 정훈,유묵,효자우물
신도비명

사우연원록



둔촌 신도비명(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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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선생 신도비



고려 우왕 13년 정묘에 봉순대부 판전교시사 둔촌 이 선생이 졸하니 탄생하신 충숙왕 십사년 정묘로부터춘추 예순하고도 하나가 되는 해이다.


육년 뒤인 임신년에 이씨 조선이 사직을 정하고 선생의 자손들은 지위가 경상에 이르니 추은하여 선생에게 의정부 좌찬성이 주어지고 현종 기유년에는 광주의 구암서원에 봉향됐는데 묘소는 광주 주치의 서쪽 음촌 유향원에 있다.


부인 정화택주 영주 황씨는 석범의 따님인데 부장하였다. 옛날부터 단갈이 있었으나 해가 오래되어 부스러지니 인조 임신년에 후손들이 그대로 인몰되어 전하지 못할가 걱정하여 다시 고쳐 세웠는데 글은 이조 정랑 휴징이 찬하였었다.


지금부터 임진년까지는 벌써 330여년이 됐는데도 아직껏 수도의 비가 없었으니 대종회에서는 선생의 사적을 수집하여 부족한 나에게 명을 부탁하게 되었다.


선생의 초휘는 원령이요, 자는 성로이며 호는 묵암자라 하였다.황고 휘 당은 광주의 향리로 국자 생원이 됐는데 광주는 본관이다.

선생은 일찌기 안 문경공 보에게 배웠는데 문경공이 매우 사랑하고 아껴 능히 황야에 숨을 수 있다고 허여 하였으니 이 익재 제현도 자주 칭찬하였다. 

충목왕 정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경서의 뜻에 밝다고 일컬어졌으며 벼슬은 합포 종사에서 비롯하여 판전교시사에 이르렀다. 일찌기 송경에 있을 때 신돈의 문객 채가와 한 마을에 살았었는데 선생은 본디 신돈을 심히 미워하던터라 중인 앞에서 그의 죄를 논척한 바 있었다.


무신년 에 이르러 화가 크게 미치려 하여 부친을 등에 업고 가족을 이끌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재를 넘어 영양에 이르니 최 사간 원도가 숨겨 주었고 기유년에 생원공이 몰하니 최공은 빈염 일체를 친상과 다름없이 마련해 주었다. 신해년에 신돈이 복주되자 송도로 돌아와 이 도은 숭인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는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데 어찌 이름만 옛것을 쓸 수 있겠는가. ) 하고 이름과 자, 호를 일시에 고쳐 이름은 집, 자는 호연, 호는 둔촌이라 하였다.


그 뜻은 이 목은 색의 둔촌기와 정 포은 몽주의 둔촌권자등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윽고 세상의 소모에서 마음을 끊고 황여의 천녕강가에 우거하였는데 목은의 침류정, 김 척약 구용의 육우당과는 서로 가까워 조석으로 대화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선생은 사람됨이 강개하여 말씨는 페부를 찔렀고 행실은 우뚝하여 절의로 자허하였는데 목은 포은 도은과는 도의로 사귀어 명성이 비등하였고 또 오촌, 팔청, 구일의 일컬음에도 두루 들어 있으니 오! 성할진저!

문장을 짓는 데에도 정련하여 충담한 필치가 있었지만 더욱이 시에 장재가 있어 여러 형태에 두루 능하였다.


조적암 신은 유아하고 조감(글을 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일찌기 동방의 절창을 역거하면서 선생의 시에 이르러서는 (향불 피우며 세상의 태평을 빌고, 밥상 대하면 풍년을 빈다)를 혼후하다 하였고, (느지막히 강해에 나와보니 풍파가 사나운데, 어느 곳 깊은 물굽이에 낚시배를 맬거나)는 침통하다 하였으며, 기다려(배에 가득히 가을달 싣고, 즐겁게 긴 피리 불면서 강루를 지나노라)는 호장하다 하였고, (어찌하면 이웃하여 두 늙은이, 살구꽃 봄비 속에 짝지어 밭갈아 볼까)는 한적하다 하였으며, (여윈 말은 석양에 울부짖고, 파리한 아이는 삭풍을 등졌구나)는 고담하다 하였는데 이 또한 지언(말을 분석하여 들을 줄 아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여러차례 병화를 겪다가 홍하와 같은 해타(시구)가 거의 다 사라졌으니 어째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들 세 분을 두어 모두 등제했으니 맏이의 지직은 형조참의, 보문각 직제학이요, 다음 지강은 좌참찬에 시호는 문숙이며, 끝의 지유는 성주 목사이다.


직제학의 3남도 모두 등제했는데 장손은 사인이요, 인손은 우의정에 시호는 충희이며 예손은 관찰사이다. 문숙의 일남은 맹손이며 통사랑이다. 목사는 4남을 두었는데 일원은 예빈시정이요, 중원은 판결사요, 정원은 이조정랑이요, 계원은 생원이다. 사인의 일남은 극규이니 문과 병조참의이다.


충희의 5남도 모두 등제했는데 극배는 영의정 광릉부원군에 시호는 익평이요, 극감은 형조판서 광성군에 시호는 문경이며, 극증은 판중추부사 광천군에 시호는 공장이요 극돈은 좌찬성 광원군에 시호는 역시 익평이며, 극균은 좌의정 광남군에 사시는 충민이니 세상에서 이르기를「廣李에는 오자과가 두 번이나 있었다」함은 선생의 형제분과 이분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 관찰은 2남을 두었는데 극기는 예조참판이요, 극견은 좌통례이다.


통사랑의 1남 극령은 홍원 교수요, 예빈시정은 2남을 두어 극간은 상장이요, 극곤은 경기 우수사이다. 판결사는 3남을 두었으니 상장 극량과 극인, 극공이다. 정랑은 2남을 두어 극창은 첨중추요, 극준은 순천 군수이며, 생원의 1남 극보는 상장이다.


그 뒤로도 대를 이어 이름 있는 자손들이 많았으니 판중추부사 광양군 세좌, 교리 연경, 병조판서 정헌공 윤경, 영의정 충정공 준경, 영의정 문익공 덕형, 공조참의 윤우, 우참찬 한남군 필영, 이조판서 문익공 원정, 공조판서 하원, 이조판서 의익 같은 분은 그 중에서도 더욱 드러난 분들이다.


오! 번성도 하였도다! 명하기를, 고려와 조선이 바뀔 즈음엔, 천지가 어지럽기도 하였지. 송악을 바라보니, 그 번화 꿈만 같구려. 탁락한 둔옹은, 중천에 높이도 날았도다. 목은 포은, 도은 그리고 척약재와 더불어 백중을 이뤘다네. 어진 스승 말씀이 있었나니,「능히 황야에 은돈할 수 있을거라」고. 돈의 뜻이 적은 것 아니어늘, 어찌 쉽게 말했겠는가. 중 신돈을 꾸짖어, 깊은 울분 쏟았으나 그 놈의 앙갚음 만나서, 영남땅에 숨었다네. 신돈이 마침내 죽임을 당하니, 하늘이 민망히 여겨 도우심이라. 흡사 다시 태어남과 같은데 이름만은 옛것을 쓸 수야 있는가. 곧고 모질게 오래도 견뎠나니, 빙월처럼 맑고 투명하도다.


황려강 위에는 시혼이 길이 머무르니, 혹은 혼후 하고 혹은 호장하며, 혹은 고담하고 혹은 한적한데 인간 세상에 흘러내려 무지개처럼 푸르고 달빛보다 희구나. 음촌의 언덕은, 울창한 유택인데, 문장과 지절로 높다랗게 사적을 남겼네. 학문은 베풀어 보지 못했고, 지위는 그 덕에 걸맞지 않았으나 그 후손 번창하니, 이로써 불식지보 갚음이라. 명경과 홍유들, 굉굉하고 익익하나니, 왕국의 동량이요, 사림의 전칙이었도다.


드디어 온 나라에서 광이를 일컫게 됐는데 어찌 감히 잊으리오. 선조의 의미 있었음을. 이에 큰 비 다듬나니 옛 법을 그대로 따르는구나. 나의 명은 추킴이 아니오라, 오는 천 년에 알리려 함이로다.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근찬]



== 대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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