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역사 / 둔촌할아버지 / 사우연원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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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할아버지 : 둔촌유사 묘갈문 정훈,유묵,효자우물
신도비명

사우연원록



둔촌 사우연원록 (師友淵源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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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잡영서문




세상에서 이르기를,


선생께서는 삼은과 서로 친하게 사귀었고 그 분들의 추중한 바 되었다고 하는 데 지금도 문헌에서 족히 고증할 수가 있으니 덕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군자들과 사귈 수 있었으며 도로써 아니했다면 어떻게 군자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공자도 정 나라에 가서는 정자산과 사귀었고 위 나라에 가서는 거백옥과 벗하였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경우였을 것이다.


일찍이 포은 선생의 글을 상고해 보니 시는 모두 삼백삼편이었는데 그 중에서 성리에 관한 저작은 겨우 네편 뿐으로 그 하나가 둔촌의 시권을 영탄하며 지은 것이었다.


여기서 선생의 학문의 조예가 참으로 깊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는데 포은의 이 저술이 아니었다면 백세뒤에 이를 증명할 길이 없었을 것이니 공자가 문헌을 중히 여겼던 것이 어쩌면 이러한 까닭에서였던가. 
 
선생께서는 여말에 태어나셨는데 일찍이 항직한 성품 때문에 역적 신돈을 거슬러 영표에 몸을 숨김이 4년이었고 돌아오자 얼마 안되어 몰하셨으며 또 몰하신 지 얼마 만에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 동안의 변고가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평생의 저술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거의 유실되고 다만 얼마의 시고가 남아 있을 뿐인데 이것도 남들의 기송에서 나온 것으로 사상의 오의나 도학의 서론은 열에 한둘도 찾아낼 수 없었으니 불행히 심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 시는 충담 연박하여 물욕 밖에 초연했던 성정에서 나온 것들이었으니 학력의 정함과 실득의 묘가 있지 않았다면 말로 발표된 바가 능히 이럴 수가 있었겠는가? 같은 시대의 대유였던 포은 선생 같은 분이 이미 우리 선생의 조예를 깊이 허여했는데 만일 사우간에 확신한 바가 없었다면 그 영탄한 바가 어떻게 이리도 친절할 수가 있었겠는가!


학문의 연원을 말한다면 선생은 안 문경공의 문하에서 배우셨는데 문경공은 바로 문성공 유의 족질로 학문이 내력이 있어 도은이 말하기를, 「안 문경의 도덕과 문장은 일세의 사표가 될 만하고 지인지명은 고인들도 미치지 못할 바가 있다.


그러기에 많은 호준들이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가장 사랑하고 아낀 이는 광주의 이군이었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모는 양기에 대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는데 기른다는 것은 의리로 집약하고 도학과 합치함에 넉넉치 못하면 얻었다 할 수도 없고 깊다 할 수도 없는 것이니 도의와 합치된 기름을 깊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유자의 극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하였다.


목로도 일찍이 안 문경공의 묘지를 쓰면서 문인으로 유표하게 드러난 사람을 간추려 혹은 정사로 혹은 부도로 들었는데 우리 선생에 있어서는 능히 황야로 숨을 수 있었음을 허여했으니 오호라! 숨는다(수)는 것의 시대적 의의는 크도다.


도를 간직하고 자락치 못할 자가 어떻게 민박한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숨는다는 것을 사람이 능히 하지 못한 지 오래인데 유독 우리 선생만을 들어서 일컬었으니 문경의 사문에 빛이 되겠기에 그런게 아니었겠는가.


이는 아마 공자가 이른바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것을 얻을 수 있었으랴.」와 흡사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포은이 이른바 「조장도 말고 잊지도 말게」나「연어는 아득히 양양하도다」등이 참으로 지나친 칭찬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포은의 제찬의 시권이 하나 둘이 아니로되 도체와 묘용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한 곳이 없는데 오직 선생에게만 그 심득의 묘를 칭찬하여「누가 감히 당할 것인가」라고 추앙까지 하였으며 끝은「아는 이 적다」로 맺었으니 가히 포은 선생이 도덕으로 서로 추허한 사람은 선생 하나 뿐이었음을 볼 수 있겠다.


최사간의 시에도「강개히 세상을 걱정하여 옷깃을 적셨는데, 유리 중의 효성은 유음까지 달했구나」하였으니 한 시대의 제현들이 충효로 추중치 않는 이 없었고 선생의 충효의 대절은 모두 학문 속의 일 아님이 없었는데 문경의 학문은 높이 조두를 받들게 되었고 포은의 어짊은 대동의 종사로 받아들여졌으나 우리 선생의 조예는 이미 그 분들과 가지런하였지만 보답을 받음에 있어서는 제공들에게만 돌아갔으니 이도 또한 선생이 세상을 숨어살면서도 후회치 않는 유의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또 포은의 간찰을 보면 말에 존경을 다하여 언제나 선생이라 하였으니 향모하는 마음이 간절치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겠는가? 심지어「환정은 나의 즐기는 바가 아니다」라 말하였고, 또 이르기를「제학에 초배되니 깊이 항만이 두려운데 선생만은 이 마음을 양찰하실 것이오」하였는데 이러한 말들은 참으로 마음을 아는 사이가 아니면 필시 이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세상에 새로운 일들이 해로 달라지고 달마다 같지 않다」고 말한 것들은 반드시 지목한 바가 있었을 것이기에 함부로 남과 말할 성질의 것은 못된다. 그러기에 선생께서 포은에게 보낸 시에도 이르기를,「병객은 오로지 한 언덕 지킬 줄만 아나니, 세간의 영욕은 뜬구름 같도다.


느즈막히 강해에 와보니 풍파는 사나운데, 어느곳 깊은 물굽이에 낚시배를 맬거나」라 하였고 눈 속에 회포를 읊은 시에도「서리를 겪은 뭇나무들 벌써 조령했는데, 추위를 견디며 청청한 건 소나무를 볼지어다.


세모에는 함께 너울거리기 기약하면서, 운수 깊은 곳에서 자작하고 있구나」라 하였으니 이로 미뤄보면 임신년의 일을 이미 은연중 살피고 나라는 망하더라도 신복은 되지 않겠다는 뜻을 가졌음을 분명하게 알겠고 숨어서 정고를 지키겠다는 생각도 엿볼 수가 있겠다.


오호라 선생은 비록 포은과는 처지가 다르고 존몰의 선후도 같지 않았지만 그 뜻만은 같았던 것이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니 광주인이다. 초명은 원령이었는데 集으로, 字는 호연이라 바꿨으며 호는 둔촌이라 하였으니 판전교시사를 지내셨다. 오호라! 선생은 배운 바를 펴보지도 못하셨고 지위는 덕에 따르지 못했으며 어지셨으나 장수하지도 못하셨기에 불후라고 후세에 전할 뿐이다.



== 대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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